고등학교시절 선생님 몰래 찾아간 음악 감상실이나 음악 다방. 낯선 풍경에 예쁜 ‘레지’누나들도 있었지만 가장 마음이 혹했던 것은 그 넓은 공간을 가들 메우고 있는 음악이었다. 메모지 가득 신청곡을 적어서 DJ박스 안에 밀어 넣은 후, 낭랑한 DJ의 멘트와 함께 흘러나오던 신청곡은 조그만 라디오 겸용 녹음기로 집에서 듣던 음악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다. 메모지를 박스 안으로 집어넣으며 흘낏 본 그곳에는 언뜻 봐도 무척이나 무거운 느낌을 주는 검정 색 투박한 모양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파랑 색의 큼지막한 팬널에 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바늘을 가진 앰프가 보였다. 나중에 안 바에 의하면 그 앰프의 이름은 ‘맥킨토시’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무렵, 마음속 깊은 곳을 울리며 지금까지 ‘내 인생의 명곡’으로 자리잡고 있는 많은 곡들은 바로 그 시스템을 통해 들었던 음악이 많다. 물론 음악을 들을 공간 등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서 아직 그 시스템은 ‘내 청춘의 로망’ 정도로 마음속에 남아있지만, 언젠가는 개인 시스템을 맥킨토시로 꾸미리라는 계획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사실 지금 나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시스템도 무척이나 애정이 가는 시스템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10년 동안 쓰자’는 생각을 가지고 구입했던 오라(Aura) VA-50 인티 앰프와 B&W DM-610 모니터 스피커는 처음 구입할 당시부터 정성스레 에이징을 한 덕분에 마음에 쏙 드는 소리로, 10년을 넘겨서도 한적한 휴식이 되기도 하고 업무의 일환이 되기도 한다. 직업의 특성상 한달 에도 수 십장의 음반을 모니터해야 하는 지금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꼭 이 시스템으로 음악을 듣는다. 이러한 ‘기계’들은 내가 뚜껑을 열고 먼지를 불어 내거나, 깨끗이 닦고 정성을 들일수록 더욱 훌륭한 소리를 내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요즈음은 어딜 가나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처음 소니에서 ‘워크맨’을 개발할 당시 과연 몇 명이 길에서 음악을 듣겠냐며 반대의 벽에 부딪힌 것을 생각한다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휴대용 음악 재생장치들은 빠르게 발전했고, 카세트에서 CD, 다시 MD의 과정을 거치며 그 축소와 디지털의 단계를 거쳤다. 이후 등장한 mp3플레이어는 고속통신의 보급과 함께 순식간에 시장을 장악하며 어떤 공간이던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나만의 음악 감상실’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음악 감상의 도구를 떠나서 ‘얼리 어답터’들의 훌륭한 장난감으로 등극했다. 이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국내 유수의 mp3 플레이어 제작 회사들은 계속해서 신제품들을 양산해 내고 있고, 휴대전화에도 디지털 카메라와 함께 필수 기능으로 자리잡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휴대용 음악 재생장치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한 것이 바로 헤드폰과 이어폰이다. 자신이 이어폰을 끼고 음악감상을 할 때 옆 사람에게 음악이 새나가지 않게 하거나, 오랫동안 착용해도 통증을 주지 않는 기능성 이어폰에서부터 수십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하이엔드’헤드폰 또, 그 헤드폰을 위한 ‘헤드폰 앰프’까지 포함한다면 그 종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이제는 종종 길에서도 이렇게 커다란 헤드폰을 착용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며, 길거리를 오가는 그들의 헤드폰은 소위 ‘댐핑’을 강조한 요즘 음악들의 박자와 함께 들썩인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장치들의 사진을 인터넷의 동호회에 올리며 묘한 희열감을 느끼기도 하며, 같은 것을 가지지 못한 회원들로부터 시기와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좋은 오디오를 통해 음악을 듣건, 좋은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듣건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조금 더 좋은 음질로 감상하려고 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턴가 기기에 중독된 나머지 그 소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이엔드의 헤드폰을 착용한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음악을 들려주는 장치는 mp3 플레이어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들은 같은 mp3 플레이어라도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음질을 들려준다고 소문난 플레이어를 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기변’을 한다. 물론 비슷한 가격대의 mp3플레이어라도 그 디코딩의 능력에 따라서 음질에 있어서의 차이는 존재한다. 하지만, mp3라는 파일 자체가 ‘손실 압축’이라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mp3파일은 보통 128kbps로 인코딩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음질을 강조한다손 치더라도 320kbps로 인코딩 한다. 인터넷 스트리밍을 목적으로 하는 wma 파일의 경우는 대개 64kbps로 인코딩 되어있다. CD에 수록된 음원인 wav파일과는 크게는 1/20에서 작게는 1/4에 이르기까지 차이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줄어든 파일의 크기만큼 분명히 음질에 있어서의 손실이 동반된다는 이야기다. 디코더가 아무리 좋고, 헤드폰의 성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소스 이상의 음질을 뽑아낸 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소위 ‘베이스 부스터’나 기타 여러 가지 이퀄라이저의 효과를 통해 원래 가지고 있는 왜곡시킬 따름이다.
헤드폰과 mp3 플레이어. 음악을 듣는 입장에서 볼 때 분명히 매력 있는 기기들이다. 여행을 다니거나, 혼자만의 운동을 할 때, 또 지루한 출 퇴근시간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호주머니의 동반자’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기들에만 얽매어서 ‘어떤 기계는 베이스가 끝내준다더라’내지는 ‘음질은 역시 XX 제품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이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이 자투리 시간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을 지언정 진정한 ‘음악 감상’의 도구는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새로운 음반 발매와 함께 해외의 밴드들과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인터뷰를 하거나, 국내의 뮤지션과 인터뷰를 할 경우 ‘사운드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라는 표현을 종종 듣는다. 그들은 음장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기타 앰프 한 대에 대여섯 개의 마이크를 설치해서 녹음을 하기도 하고, 드럼의 톤을 잡는 데만 며칠을 소요한다. 그렇게 녹음한 음원을 손실 압축으로 만들어진 파일로 감상하면서 과연 음질이 어떠니, 녹음 상태가 어떠니 이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까.
mp3 플레이어의 용량이 늘어나면서 그 가격도 만만치 않게 비싸졌다. mp3 플레이어 한 대를 살 돈이라면, 비싸지는 않지만 무난한 오디오 시스템을 갖출 수도 있다. 락음악을 사랑한다면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번쯤은 그동안 답답한 이어폰에 의해 속박되었던 귀를 해방시키고, 오디오 시스템 앞에서 정좌하고 음악을 들어보자. 비로소 뮤지션이 음반 한 장을 위해 들였던 정성의 1/10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마치 음악 감상실에 처음 갔던 기자의 경험처럼 언제나 듣던 귀에 익숙한 음악이라도 분명히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월간 핫뮤직 200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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