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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MUSIC LIFE/EXTERNAL CONTRIBUTIONS

재발매되는 국내 걸그룹의 효시, 희자매

우리의 예전 음악에 대한 재조명 사업들은 2000년대에 들어서며 의식 있는 소규모 레이블의 노력에 의해서 조금씩 가시적인 성과로 드러났다. 신중현 사단이 발표했던 많은 명반군에서부터 히 식스의 묻혀있던 걸작들과 같은 초창기 록이나,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과 그 주변 뮤지션들이 발표한 국내 포크 태동기의 많은 앨범들이 깨끗한 음질로 재발매되며 국내 록과 포크의 진보성을 새롭게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기형적으로 유행한 소위 ‘7080음악’에 대한 기형적인 관심은 우리의 예전 음악에 대해 힘들게 만들어왔던 지형도를 다시 바꿔놓았다.

오랜만에 공연장이나 브라운관에 등장한 뮤지션들은 재발매된 음반에 수록된 진보적 음악보다는 청자들의 추억이나 향수에 기대는 선곡과 편곡으로 함께 출연한 다른 가수들보다 돋보이려 애썼으며, 어려웠던 예전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청중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물론 이러한 흐름 역시도 너무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았던 지금이라는 현실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부인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활동하고 있는 많은 가수들을 미끼로 한 다양한 종류의 컴필레이션 음반들이 어렵사리 발굴되고 있는 초기 우리나라 음악의 명반들이 형성하고 있던 파이를 잠식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자는 것이다. 다행인 부분은 어려운 현실 가운데도 소규모 레이블들에서는 꾸준하게 재조명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재조명 사업이 이제는 비단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이르는 록과 포크라는 한정된 시간과 장르에 구속되지 않고, 보다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무척 고무적이다. 오랜 작업을 마치고 발매를 서둘고 있는 희자매의 안타기획시절 음원을 모은 《희자매 - 디스코 걸스: 안타 레코드 이어즈 앤쏠로지 1978~1980》는 이러한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 하다.

"희자매 - 디스코 걸스: 안타 레코드 이어즈 앤쏠로지 1978~1980"
THE HEE SISTERS - DisKo Girls: The Anta Records Years Anthology 1978~1980

DISC 1
1. 실버들 2. 우리는 사랑해요 3. 이제는 모두 잊어요 4. 앵두 5. 말도 안돼 6. 아리랑 내님아 7. 어찌합니까 8. 사랑만은 않겠어요 9. 오동잎 10. 칸나의 뜰 11. 그 사람 12. 가을밤의 이야기(Carmelita) 13. 한 마리 새가 되어 14. 님 찾아가는 길(Too much Heaven) 15. 나그네 길(You're The One That I Want from 'Grease') 16. 내 마음 17. 말해주세요 18. 돌아와요(Brandy) 19. 첫사랑

DISC 2
1. 망향 2. 약속 3. 연안부두 4. 내 마음 그곳에 5. 희망 속에 살자 6. 가을비 우산 속 7. 뜬소문 8. 구름 나그네 9. 순아 10. 그 사람 바보 11. 그대 먼저 12. 행복하세요 13. 연인 14. 아무도 몰라요 15. 시인의 독백 16. 마음의 별 17. 달무리 18. 비야 내려라 19. 사랑의 화살(Cupid)
  
DISC 3
1. DJ YTst Mix inspired by 아리랑 내님아 2. DJ JINBO Mix inspired by 우리는 사랑해요(꿈속에서) 3. DJ MOOD SCHULA Mix inspired by 희망 속에 살자 4. DJ PEEJAY Mix inspired by 님 찾아가는 길 5. DJ SIMO Mix inspired by 그대 먼저 6. DJ SOULSCAPE Mix inspired by 뜬소문


흑인 혼혈 여성싱어 김인순(인순이)을 얼굴로 내세운 희자매는 육감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한 섹시하고 글래머러스한 여성 트리오였다.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요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소위 ‘걸 그룹’들의 원조 격이라고 할까. 물론 그때까지 국내에 여성 중창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스튜디오 54’에서 갓 나온 듯한 희자매의 비주얼과는 그 근본부터 달랐다. 그리고 그러한 비주얼에 당시 인기의 고공비행을 하던 안타기획의 탁월한 작, 편곡과 연주력이 더해지며 독특한 음악적 성과를 만들어냈다. 김인순은 희자매의 매니저였던 한백희에 의해 가장 늦게 희자매에 합류했다. 한백희는 1970년대 미8군 클럽 무대에서 팝과 라틴 음악으로 활동하던 여자가수로, 후일 김인순이 솔로로 독립하여 결성한 백댄서 집단이던 리듬 터치 출신 김완선의 이모다. 김인순 역시 한백희의 백댄서로 활동하다가 픽업되었다. 안타기획은 ‘등불’, ‘달무리’와 같은 히트곡을 발표했던 영 사운드의 안치행이 대표로 있던 기획사다. 여기에 10대 시절 신중현과 더 멘에서 기타와 키보드를 담당할 만큼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김기표가 작곡과 편곡을 맡았고, 역시 신중현과 더 멘 출신 베이시스트 이태현이 실무를 맡는 등 국내 록 1세대 뮤지션을 주축으로 하는 집단이었다.

희자매의 데뷔앨범이 발표된 것은 안타기획이 최헌, 윤수일 등 밴드 1세대 출신 보컬리스트들을 간판으로 내세우며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히트메이커로 군림할 당시인 1978년이다. 그리고 희자매는 소월의 시에 멜로디를 붙인 ‘실버들’을 방송을 통해 꾸준하게 에어 플레이시키며, 이듬해 MBC 10대 가요제에서 여자 중창부문을 거머쥔다. 안타기획의 탁월한 선구안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인 것이다.
 


하지만 ‘실버들’의 빅 히트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트랙의 대부분은 마치 희자매가 부르는 안타기획 베스트 음반 듣는 듯 소속 뮤지션들인 최헌(앵두, 어찌합니까, 오동잎), 윤수일(사랑만은 않겠어요)에서 영 사운드(달무리)까지의 기 발표 히트곡이다. 때문에 오롯이 희자매를 위한 음반이 아니라 급조된 음반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물론 그 편곡과 연주에서 당시 해외의 트렌드를 발 빠르게 수입한 본격적인 훵크/디스코를 선보이는 등 기존 히트곡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기존 히트곡들은 그 제목만으로도 청자들에게 주는 무게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이듬해인 1979년 발매된 2집 《Disco》는 비록 네 곡의 번안곡이 포함되긴 했지만, 어쨌거나 온전히 희자매를 위한 음반이란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또 ‘록뽕’, 혹은 ‘트로트 고고’로 대변되는 안타기획의 히트 메이커였던 안치행의 곡이 하나도 삽입되지 않고 창작곡들은 모두 김기표의 곡으로 이루어져, 음반의 타이틀이자 희자매가 추구하는 음악인 ‘Disco’에 완벽히 일치하는 음반을 의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는 실제 결과로 이어져, 데뷔앨범처럼 눈에 띄는 대표곡이 담겨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희자매 최고의 음반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전작에서 다소 아쉬움으로 남았던 곡과 가창자간의 이질감은 희자매에 맞춤형으로 제작된 듯한 ‘한 마리 새가 되어’, ‘내 마음’과 같은 곡에서 완전한 합일점을 만든다. 소울풀한 김인순의 뛰어난 가창력을 중심으로 횡적으로 확장되는 코러스파트의 다채로움은 적절하게 삽입되는 퍼커션 연주와 함께 곡에 입체감을 부여한다. ‘한 마리 새가 되어’는 한해 뒤 숙자매도 같은 반주에 노래만 더빙하여 발표해 히트시켰을 만큼 1970년대 한국 디스코를 대표하는 곡이라고 할 만하지만, 그 음악적 성과에 있어서는 희자매 쪽에 손을 들어줄 만 하다.

희자매는 이 음반 발매에 즈음하여 사랑과 평화를 대동해 ‘리사이틀’을 벌인다. 당시 주간지 에는 데뷔 1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활동한 뮤지션이 이러한 대규모 공연을 펼치는 것은 전례 없는 신기록이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만큼 희자매의 인기가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에 대한 증명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기의 상종가는 아쉽게도 후속작 이후 김인순의 탈퇴와 함께 급격하게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다. 음악적 성과가 부족했다기보다는 추진력을 잃은 까닭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에 화려하게 재발매되는 《희자매 - 디스코 걸스: 안타 레코드 이어즈 앤쏠로지 1978~1980》는 활동 당시 시각적인 부분에 많은 초점이 맞춰진 까닭에 정당한 평가가 유보될 수밖에 없었던 희자매의 윤기나는 검은색 음악적 매력을 다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예전 것은 아직 ‘고리타분한 것일 뿐’이라는 선입견이 드는 이들에겐 DJ 소울스케이프를 비롯한 다섯 명의 DJ들이 희자매의 사운드에 대한 오마쥬를 담은 세번째 CD를 먼저 권한다. 희자매의 매력이 청자들의 추억에만 호소하며 인기를 구걸하는 소위 7080 음악들처럼 과거에 대한 나약한 집착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꾸준하게 이어오는 진취적인 에너지임을 분명 함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송명하 (20110909)

* 밀러 공식 블로그(http://blog.naver.com/blogmiller)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