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NER'S MUSIC LIFE/EXTERNAL CONTRIBUTIONS

비틀즈와 함부르크

함부르크는 독일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독일 내에서는 베를린 다음가는 도시 그리고, 유럽 교통의 요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는 도시이다. 일찍이 멘델스존과 브람스라는 음악의 거장들을 낳은 도시. 중세시절부터 한자동맹 도시였기 때문에 일찌감치 경제적으로 발달한 도시이며, 지금도 18세기의 바로크 양식인 일명 미셸이라고 불리는 132m 높이의 미하엘리스 성당과 5개의 교회 철탑들이 현대적인 건물과 함께 한데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또한 전통의 언론 산업의 중심지 함부르크의 출판은 독일의 모든 신문과 잡지의 전체 발행 부수의 50% 이상에 해당하며, CD와 음악 카세트 레코드 생산의 중심지가 되기에 이른다. 이 외에도 오늘날 우리들이 즐겨먹는 빵과 야채사이에 고기를 끼워 먹는 ‘햄버거’의 명칭이 유래된 곳이기도 하며, 함박스테이크는 함부르크의 전통적인 스테이크 요리방식이기도 하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주변에 무척이나 가까이 와 있는 그들의 문화들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함부르크와 함께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음악을 넘어서 당시 한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던 ‘비틀즈(The Beatles)’가 바로 그들이다.


비틀즈와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는 도시는 역시 그들을 배출한 도시 영국의 리버풀이다. 비록 얼마 전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바 있지만, 항구도시 리버풀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바로 비틀즈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노래 가운데에서 폴 맥카트니의 ‘Penny Lane’, 존 레논의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소재가 되었던 그곳. 하지만,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도시는 함부르크이다. 왜 리버풀이 아니고, 함부르크일까. 함부르크는 무명시절 비틀즈의 활동무대였고, 그들의 젊음과 고뇌 그리고 사랑이 숨쉬고 있는 곳이며, 비틀즈로 인해 세상에 뻗어나가게 되는 한 문화가 잉태된 곳이다. 그 중심점에는 우리가 알고있는 비틀즈가 있었으며, 주변에 제 5, 제 6의 비틀들이 있었다.


지금은 신화가 된 비틀즈이지만, 그들에게도 무명시절은 있었다. 비틀즈가 무명시절 활동하던 주무대는 바로 함부르크였다. 함부르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복구에 성공한 독일의 신흥 부자 도시로서 경기가 좋았고, 젊은 계층의 자유로운 소비문화가 일찍부터 형성되어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큰 뜻을 가지고 자신들의 자유로운 음악을 펼치려했던 비틀즈에게도 안성맞춤인 도시였다. 


“나를 성장시켜준 곳은 리버풀이 아니라 함부르크였다.”


‘나’의 의미는 존 레논(John Lennon) 자신뿐만이 아닌, 비틀즈라는 그룹을 성장시켜주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이 살던 리버풀에서와는 달리 하루 8시간 이상의 계속된 연주는 그룹의 팀웍과 함께 음악적인 기량을 증폭시키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특히 독일 관객들의 보다 격렬하고 시끄러운 음악적 취향은 전혀 새롭게 태동할 이들의 음악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일 것이다.


길지 않았던 비틀즈의 함부르크 생활 가운데에는 이후 이들의 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세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한 사람과의 이별이 있었다. 첫 번째의 만남은 크라우스 부어만(Klaus Voorman)이었다. 하루 8시간 이상씩 고된 연주를 하던 클럽에 우연히 찾아온 크라우스 부어만은 이후 비틀즈가 성공한 이후에도 계속되는 교류를 가지며 음반 [Revolver]의 독특한 자켓을 디자인했다. 크라우스 부어만은 비틀즈가 해산한 이후 존 레논의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에 키보드로 참여해서, 음반 [Imagine]에서 건반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들이 함부르크에서 묵고있던 클럽에 딸린 조그만 숙소에 하룻밤 신세를 졌던 드러머 링고 스타(Ringo Starr)는 비틀즈가 함부르크를 떠나 다시 영국에서 활동할 때 피트 베스트(Pete Best)의 후임으로 네 번째 비틀이 된다.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the Hurricanes)’에서 활동하던 링고 스타가 비틀즈에 합류했던 이유는 단지 비틀즈가 음반을 먼저 발표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링고 스타와의 만남은 비틀즈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 함부르크에서의 두 번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크라우스 부어만의 소개로 비틀즈가 일하는 클럽을 찾아온 아스트리드 키르허(Astrid Kirchherr)가 있다. 아스트리드 키르허는 레코드사와 관련이 있는 포토그래퍼였다. 아스트리드 키르허와 스튜어트 서트클리프(Stuart Sutcliffe)의 사랑. 그리고 그 둘 모두를 사랑했던 존 레논의 삐뚤어진 관심. 불편했던 이들 사이의 종말은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의 죽음으로 종지부를 맺는다. 1961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함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영국에서의 성공적인 공연 이후 그를 찾아 함부르크로 온 존 레논에게 아스트리드 키르허는 죽음을 알린다.


“그는 내 품에서 죽었다. 예기치 못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나 뿐만 아니고, 그를 아는 누구든지 그가 대단한 마음과 원초적인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천재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만일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는 두드러졌을 것이다.”


한 사람과의 이별은 바로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와의 이별이다.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존 레논과 대학 동창으로, 미술을 전공했다. 음악적인 소양은 부족했지만, 존 레논에게 있어서는 또 한 명의 페르소나로 존재했다. 함부르크의 연주생활 가운데에서 가장 집요하게 폴 맥카트니(Paul McCartney)의 질시를 받았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존 레논의 위치는 언제나 리더의 자리였고, 그 옆에 서기를 바랬던 폴 맥카트니는 음악적으로는 함량미달이라고 할 수 있는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의 등장 때문에 자신의 자리가 위협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폴 맥카트니는 이후의 인터뷰들에서도 함부르크에 있을 당시를 ‘철저하게 망가졌던 시기’라고 회상하고 있다.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존 레논의 질투를 한껏 받으며 아스트리드 키르허와 짧은 사랑을 불태우고 22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중요한 만남과 이별의 중심 축에 서 있던 인물은 조금 전 언급되었던 아스트리드 키르허였다.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와 아스트리드 키르허의 관계가 존 레논이 가진 질투의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그녀가 당시 존 레논의 이상향이라는데에 있다. 성장과정에서 언제나 모성애에 굶주렸던 존이 아스트리드 키르허에게서 느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을까. 그녀가 직접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에게 해 주었던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나머지 모든 비틀즈 멤버들에게로 전해지면서 말끔한 차림, 머시룸 컷으로 불리는 헤어스타일과 함께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그들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소위 ‘비틀즈 룩(Beatles Look)’으로 불리는 하나의 패션 경향이 된다. 하지만, 스튜어트 서트클리프 사망 이후 ‘거물’이 되어버린 비틀즈와의 관계는 이후 그녀가 포토그래퍼로서 생활하는 데에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약혼자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의 사망이라는 굴레를 벗고 3년 만에 다시 포토그래퍼로 재기한 그녀에게 각 잡지사나 신문사들에서 요구한 것은 예전 비틀즈의 사진뿐이었다.





비틀즈의 초기 모습들과 아스트리드 키르허의 관계들은 1994년에 공개된 영화 ‘백 비트(Back Beat)’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녀는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했다. 물론, 비틀즈 내에서는 언제나 주변인물이었던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의 비중이 너무 높게 설정되지 않았냐는 이야기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10년 전에 개봉된 영화 자체도 초창기 함부르크 시절 비틀즈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물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혹독한 경험이었겠지만, 비틀즈의 함부르크의 생활은 이후 이들의 음악적인 청사진을 완성하는데 가장 소중한 시기였다. 리버풀로 돌아온 비틀즈는 조그만 클럽인 ‘캐번 클럽(Cavern Club)’을 거점으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후 또 하나의 역사적인 만남이었던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ein)과의 조우로 인해서 향후 10여년간 비틀즈가 세계최고의 밴드로 거듭나게되는 밑거름을 마련하게 된다. 어떻게 본다면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 그리고 프로듀서였던 조지 마틴(George Martin)과의 만남이 분명 그룹으로서 비틀즈의 위상을 높이고 음악적인 완성도를 부여하는 데에 절대적이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젊은 시절을 일곱 가지 빛깔로 수놓았던 함부르크의 시절이 더 아름다워보이는 이유는, 완성된 형태가 아니고 빈자리를 하나씩 채워 나가고 있는 미완으로서의 애틋함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아스트리드 키르허가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애써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랭보와 에디뜨 삐아프의 자리가 존 레논의 가슴속에서 점점 커다랗게 느껴졌던 것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비틀즈와 그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서 되돌아본 함부르크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젊은 예술인들의 열정과 사랑 그리고, 고뇌가 살아서 숨쉬는 곳이었다. 당시 아스트리드 키르허의 앵글에 들어왔던 5명의 비틀 가운데 이미 세 명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지 오래다. 하지만, 비틀즈와의 애정이 바탕이 된 그녀의 사진은 지금까지도 함부르크시절 비틀즈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게 담긴 사진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존 레논은 1965년 공개된 비틀즈의 음반 ‘Rubber Soul’에 돌아갈 수 없는 당시의 시절과,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를 그리는 아름다운 노래 ‘In My Life’를 수록했다. (20040927, 한국예술학교신문)



In My Life 

By John Lennon and Paul McCartney 


There are places I remember all my life,


Though some have changed,

Some forever, not for better,

Some have gone and some remain.


All these places had their moments

With lovers and friends I still can recall.

Some are dead and some are living.

In my life I've loved them all.


But of all these friends and lovers,

There is no one compares with you,

And these memories lose their meaning

When I think of love as something new.


Though I know I'll never lose affection

For people and things that went before,

I know I'll often stop and think about them,

In my life I'll love you more.


Though I know I'll never lose affection

For people and things that went before,

I know I'll often stop and think about them,

In my life I'll love you more.

In my life I'll love you more. 



글 송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