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 인 어 홀(Down In A Hole)은 2002년 1월, 사일런트 아이 출신의 보컬리스트 서준희와 기타리스트 이동규가 프로젝트 형식으로 곡을 만들어 프로젝트 형태로서 앨범 녹음을 하는 과정에서 루머 출신의 김동원(기타), 박지찬(베이스), 김동렬(프로그래머)을 영입하고, 오디션을 거친 여성 보컬리스트인 이연경이 녹음에 합류하며 결성되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소프라노가 공동 보컬리스트로 참여하여 고딕과, 인더스트리얼, 메틀 등 여러 장르를 융합한 크로스오버적인 사운드로 주목받았으며, 2003년 데뷔앨범 [Alone In Paradise]를 발표한 후 같은 해 부산국제락페스티벌에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2003년 컴필레이션 [Indie Power 2003]에 ‘이름 없는 새’로 참여한 후, 2005년 발매된 EP [Road Of Down In A Hole]에서는 리더인 서준희와 기타리스트 이동규를 제외한 모든 멤버가 교체되었다. 현재 다운 인 어 홀이 추구하고 있는 본격 아메리칸 하드락 스타일로 밴드의 노선을 선회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원래 출발 당시 프로젝트 성향이 짙은 밴드였기 때문에 2007년과 2009년에 발매된 2, 3집, 2008년 초에 공개된 디지털 컴필레이션 [WhAt'S uP? II; 와스프 발라드 컬렉션] 역시 서준희를 제외한 많은 멤버의 교체가 있었지만 밴드는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2집 발매부터 활발하게 가져왔던 일본 밴드들과의 교류를 통한 MXTV 방송출연, 도쿄와 나고야의 클럽 공연 등을 펼치기도 했다.
사실 앞서 다운 인 어 홀이 걸어왔던 10년을 간단하게 정리한 내용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의 지난 행보는 언제나 국내의 다른 뮤지션들이 걷지 않았던 곳을 향한 도전의 과정이었다. 아니 밴드의 출발선에서 보여줬던 다양한 장르들의 이종교배나, 이후 본격 아메리칸 하드락 스타일로 선회했을 때 시도했던 클린 보컬과 강렬한 익스트림메틀식 샤우팅 보컬의 자연스런 공존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의 락음악에 익숙한 청자들이 듣기에도 분명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 새로운 시도들은 단지 실험에만 그치지 않고 어느덧 다운 인 어 홀의 사운드를 규정짓는 키워드가 되었다. 그리고 2011년. 밴드의 결성 10년을 맞는 해에 다운 인 어 홀은 또 한 장의 새로운 EP를 발표했다. ‘내 자신의 결정대로 모든 것을 헤쳐 나가겠다’는 한 인간의 확실한 열정과 의지가 담긴 오프닝 트랙 ‘Real Life’는 그대로 앨범의 타이틀이 되었다. 정규 앨범 사이의 EP는 대체로 세 가지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하나는 밴드가 추구하는 음악을 빡빡하게 담아 주입식으로 전달하는 정규앨범의 규격화된 정형성을 벗어나서 보다 대중 친화적인 음악을 담을 수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EP 이후에 정식 발매될 정규 앨범의 성격에 대한 복선의 역할을 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은 멤버교체 후 그들을 소개함과 동시에 밴드의 결속력을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다운 인 어 홀의 EP [Real Life] 역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접근하면 좋을 듯 하다.
이번 음반에서는 군 복무를 마치고 복귀한 드러머 이충훈과 밴드 왓(What!) 출신의 기타리스트 키미 건(Kimmy Gunn), 그리고 이미 2집과 3집에서 베이스를 맡았던 김지환이 밴드의 중심인 서준희와 호흡을 맞췄고, 현재는 타이거(Tiger)에서 활동하는 베이시스트 킹 타이거(King Tiger)가 음반 녹음 이후에 가입하며 밴드의 일원이 되었다. 다운 인 어 홀의 음악을 색깔에 비유하자면 연필로 그린 소묘처럼 은근함 가운데 음영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무채색이다. 아무리 진하게 덧칠을 해도 완전히 검은 색이 되지 않는 은근한 고유의 색을 지니고 있으며, 한 번의 터치만으로도 그 느낌이 180도 변모할 정도로 섬세함을 필요로 한다는 점 역시도 다운 인 어 홀의 음악과 닮아있다. ‘Jannie’가 한글가사와 영어가사로 이루어진 한 곡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총 네곡의 신곡이 담긴 이번 음반을 통해서도 그러한 특징은 어김없이 노출된다.
음반의 오프닝트랙 ‘Real Life’는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리프와 팽팽한 드럼 라인이 반박을 사이에 두고 숨 가쁜 추격전을 벌이며 긴박한 긴장감을 유도하는 검은색 트랙이다. 2집과 3집 앨범을 통해 보여줬던 다운 인 어 홀의 가장 직선적인 면만을 추린듯한 보컬의 파워풀한 질주감이 일품이다. 왓에서 활동할 당시 마초적인 밴드의 사운드에 눌려 부각되지 못했던 키미 건의 멜로디어스한 중반부 기타 애들립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 그런가하면 인더스트리얼 풍의 강력한 리프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댄서블한 리듬파트와 단순한 남성 코러스라인으로 풀어간 ‘Come On’과, 반음하강의 미학에 소울풍 여성 코러스가 더해진 ‘TV Star’를 통해 장르간의 벽은 또 한번 허물어진다. 굳이 표현한다면 회색빛깔의 트랙이랄까. 흙먼지 날리는 한적한 시골 느낌의 밴드사운드는 이제 도회의 회색 콘크리트 숲과 공간적인 교류를 하며 정규 앨범을 통해 제대로 교감하지 못했던 또 다른 대중들과 소통한다. 전체적으로 마치 솔로연주를 하듯 화려한 악기파트의 연주를 담고 있지만, 모나서 혼자 튀지 않고 밴드의 음악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모습도 진일보한 밴드의 현재 모습이다. 흰색의 도화지에 스쳐지는 어쿠스틱 기타와 현악이라는 섬세한 연필자국이 조금씩 단단한 구조로 발전해가는 아름다운 서정시 ‘Jannie’는 특이하게 영어가사와 한글가사의 두가지 버전으로 수록된 넘버로 인상적인 후반부의 멜로디가 애틋하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다운 인 어 홀식 발라드 넘버.
이름을 모두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우후죽순처럼 돋아난 서바이벌식 음악 프로그램의 인기 덕인지 요즘 거리엔 머리를 기르고 악기를 어깨에 둘러 멘 많은 뮤지션, 혹은 뮤지션 지망생의 모습이 부쩍 눈에 띈다. 또 7080 혹은 직장인 밴드의 열풍으로 악기점을 배회하는 넥타이부대를 만나는 일도 그렇게 낯설진 않다. 일반인들의 눈으로 볼 때 어쩌면 이들과 묵묵히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밴드들의 모습이 같은 실루엣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저 알고 있는 코드 몇 개만으로 뮤지션인냥 어깨에 힘만 주고, 수준 이하의 공연으로 그나마 어렵게 클럽을 찾은 관객의 발길을 돌려놓게 만드는 밴드들이나, 생활을 핑계로 음악을 떠났다가 자신의 여가시간을 위해 다시금 악기를 손에 잡는 친목 모임식의 밴드와 10년 이상 치열한 현실을 스스로 개척해온 밴드를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불성설이다. 다운 인 어 홀의 3.5집에 해당하는 [Real Life]는 밴드의 지난 10년을 스스로 추스름과 동시에 사이비 뮤지션들에게 건네는 묵직한 충고이며, 앞으로 펼쳐질 또 한번의 역사를 개척하리라는 결의에 찬 출사표인 것이다.
글 송명하 (201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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