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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MUSIC LIFE/MUSIC LIFE

경인방송 '가고싶은 마을', 조용필 특집

코너와 김순곤씨

코너와 백영규님

서울로 올라가는 열차 안에서 급하게 받은 전화 한통. 경인방송 '백영규의 가고싶은 마을'에서 준비하는 21일간의 대규모 특집인 조용필 특집에 팬널로 출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고 선뜻 'OK'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니, 대전이나 서울도 아니고 인천에 있는 방송. 또 자타가 공인하듯 막강한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조용필의 음반에 대해 두시간 동안 함께 진행을 해 나가야 할 문제는 적잖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 담당 PD에게 전화를 해서 혹시 다른 팬널을 섭외할 수 없겠냐고 물어봤지만, 결론은 2회 이상 출연해야하는 횟수를 한번으로 줄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한 번의 출연에 내가 맡은 음반은 조용필의 음악성이 확고해지기 시작한 네번째 음반. 나 이외에 다른 팬널로 3집의 '고추잠자리'와 4집의 '못 찾겠다 꾀꼬리', '난 아니야' 등을 작사했던 작사가 김순곤씨(첫 번째 사진에 계신 분)가 섭외되었고, 내 제안으로 당시 위대한 탄생의 드러머 이건태씨가 전화로 연결되었다.

미리 입을 맞춘 것과는 다른 질문에 당황한 이건태씨의 다소 까칠한 대답과 다소 우왕좌왕한 진행때문에 준비해둔 이야기가 조금 왜곡되게 전달되어 청취자 게시판을 통해 불만의 이야기들이 몇몇 등장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2월 14일 방송은 그런대로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두 시간 방송을 위해 거의 하루 온종일을 투자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꺼내 든 조용필의 음반이, 가진 것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풍요로웠던 당시를 떠올리게 해 좋았고, 방송을 진행하던 백영규님과 만났던 것도 두고 두고 이야기할 만큼 새로운 추억이 된 하루였다. 아래는 그 날 방송출연을 위해 준비했던 메모 내용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용필 4집
1982.05.17
Jigu (JLS-1201706)

Side A
 1. 못 찾겠다 꾀꼬리
 2. 생명
 3. 보고싶은 여인아
 4. 난 아니야
 5. 산장의 여인
Side B
 1. 꽃바람
 2. 자존심
 3. 비련
 4. 따오기
 5. 민요 메들리
 (81 해운대 비취 페스티발 실황)

* ‘못 찾겠다 꾀꼬리’는 단순한 유행가의 인기를 떠나 하나의 유행어가 되었다. (예전 신중현의 ‘거짓말이야’나, ‘미인’처럼.) 물론 이러한 성공의 배후에는 3집 수록곡 ‘고추잠자리’의 히트가 있었다.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갈 음악에 대한 복선과도 같았던 이 곡의 히트는 4집의 ‘못 찾겠다 꾀꼬리’, 5집의 ‘나는 너 좋아’로 이어져 나갔다.

* ‘못 찾겠다 꾀꼬리’는 조용필의 가출시절을 노래한 곡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작사가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땠을까.

* 영11이나 젊음의 행진과 같이 젊은이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물론, 어린이날 특집 프로그램이나 장수만세와 같은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 - 물론 한 장의 음반에 여러 계층을 겨냥한 다양한 음악이 수록되기도 했지만, 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연령층을 감싸 안을 수 있는 포용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못 찾겠다 꾀꼬리’와 같이 그 수용층이 20대 이하일 것 같은 음악도 전 연령층에 고른 사랑을 받았다. 이는 분명 1970년대 초 밴드 붐을 통해 배출된 70년대 후반의 인기가수들(최헌, 조경수, 윤수일, 장욱조, 최병걸, 장계현, 함중아 등)과는 분명 커다란 경계를 지을 수 있는 부분이다.

* 조용필은 1980년 여성중앙과의 인터뷰를 통해 앞으로 가수로서의 희망에 대해서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에 국악의 전통을 가미시킬 수 있는 신민요를 개발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 이는 젊은이들, 나이 많은 이들 누구나 부르고 참여할 수 있는 노래, 여러 세대의 심금이 함께 울리게 되는 국민의 노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러한 계획이 구체화 된 것이 바로 공식 네 번째 음반인 본 작이다.

* 1집에서 3집까지의 음반에 민요를 수록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머릿속에 그려왔던 조용필식 신민요의 결과는 바로 ‘못 찾겠다 꾀꼬리’와 ‘자존심’이다. 이 두 곡의 리듬파트를 주위 깊게 들어볼 필요가 있는데, 특히 ‘자존심’에서 선보이는 이건태의 드러밍은 셔플리듬에 국악 장단을 더한 독특한 것이었다. 슬랩 베이스의 절묘한 느낌과 함께 서구에서 들어온 락음악을 토착화하는데 커다란 일조를 했다.

* 신민요 이외에도 조용필은 4집을 통해 본격적으로 밴드중심의 음악을 선보이며 락음악을 주요 문법으로 사용했다. 락음악은 분명 과격하고 시끄러운 음악만은 아니다. 연주와 노래는 물론 기승전결의 확실한 구성을 가진 곡에 장중한 느낌의 신세사이저를 전격 도입해 가요의 고급화를 일궈낸 것이다. 4집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비련’이나, ‘생명’과 같은 곡이 이에 속한다.

* ‘비련’은 다들 알고있다시피 ‘오빠부대’를 이끌었던 곡이다. "기도하는~”에 이어지는 “꺄악~”하는 비명소리는 우스개 소리로 ‘가사의 일부분’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때론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게 메아리쳤다.

* 이러한 신민요나 고급화된 가요를 통해 락음악을 대중과 친숙하게 만들었고, 또 이러한 곡들에서 보여준 모험과 실험이 단지 시도에만 그치지 않고 조용필을 대표하는 히트곡으로 자리 메김 했다는 사실이 이후 국내 가요의 발전에 있어서 청신호가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 조용필이 음반에 수록했던 드라마 주제가들은 그 드라마보다 오히려 더욱 커다린 히트를 했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1집에는 ‘창 밖의 여자‘가, 2집에는 ‘축복(촛불)’과 ‘간양록’, 3집에는 ‘물망초’, 4집에는 ‘꽃바람’, 그리고 5집에는 ‘산유화’가 각각 수록되었다.

* 초기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보면 목소리가 무척 가늘고 얇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1980년에 발표한 정규 1집부터 그는 판소리에서 차용한 탁성과 디스코시대에 비지스가 선보였던 가성을 또 하나의 무기로 사용했음을 볼 수 있다. 예전 장욱조도 ‘왜 몰랐을까’ 같은 곡에서 이러한 가성을 사용해 취입한 바 있지만, 조용필은 비지스나 장욱조의 경우처럼 노래 한 곡을 온통 가성을 사용해 부르기보다는 곡의 특성에 따라 진성과 가성을 교차시키며 사용했다. 1집의 ‘단발머리’나, 2집의 ‘잊기로 했네’에 이어 4집에 수록된 ‘난 아니야’가 그런 경우로, 동요적이거나 여성스러운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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