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코의 열풍과 함께 제2의 ‘밴드 붐’을 몰고 왔던 치열한 연주집단. 그 첫 번째 기록.
국내 록에 대한 재발굴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가장 놀라움을 선사했던 밴드 가운데 하나는 바로 김대환이 이끌던 김 트리오였다. 1세대 락 드러머인 그의 김 트리오는 조용필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최이철과 이남이라는 빼어난 연주인들이 포진했던 그룹이었다. 김대환의 김 트리오가 화두로 등장하며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된 밴드가 있다. 바로 ‘연안부두’라는 스매시 히트곡을 기록했던 또 하나의 김 트리오다. 사실 김대환의 김 트리오에 대한 존재 여부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을 때, 김 트리오라고 하면 바로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물론, 잊혀졌던 역사를 바로 맞춘다는 의미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만, 두 김 트리오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상황에서 그저 ‘잘난 척’하기 위해 그 이름만을 들먹이고 있는 현실은 조금 안타깝다. 바로 그들에 의해서 70년대 말의 독보적인 펑키밴드였던 김 트리오는 한낮 ‘연안부두’를 히트시킨 ‘트로트 고고 (Trot+Go Go)’ 내지는 ‘록뽕 (Rock+Trot)’밴드로 폄훼되고 있으니 말이다.
1. 안타기획, 1970년대 후반의 히트 메이커
김 트리오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살펴볼 집단이 하나 있다. 바로 영사운드 출신의 안치행이 설립했던 ‘안타 기획’이다. 1970년대 초반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했던 국내의 락 음악은 1975년 소위 ‘대마초 파동’을 맞으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경향신문>은 1975년 8월 22일자 ‘다시 사라지는 그룹사운드’라는 기사에 “장발, 퇴폐 단속으로 된서리”, “겨우 3, 4팀만 명맥 유지”, “보컬팀 노래 예륜 금지로 가속”이라는 부제를 뽑았다. 더 이상의 국내활동에 의미를 잃은 로커들은 도미했으며, 남아있는 밴드의 멤버들은 지하 나이트클럽으로 자신들의 활동무대를 옮겼다. 밴드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보컬리스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해 왔던 락에 ‘유행가’를 접목시키며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바로 이렇게 록과 유행가 가락이 만난 음악이 전 세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트로트 고고’이며 ‘록뽕’이다. 1970년대 후반, 우리 가요계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대표 남자가수들인 조용필, 최헌, 윤수일, 조경수, 최병걸, 김훈, 함중아 등은 이미 그림자, 검은 나비, 솜사탕, 메신저스, 트리퍼스, 양키스 같은 밴드에서 활동한 록 밴드 출신의 보컬리스트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솔로로 독립하며 히트시켰던 곡들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오동잎’, ‘사랑만은 않겠어요’, ‘아니야’, ‘진정 난 몰랐었네’, ‘나를 두고 아리랑’, ‘안개 속의 두 그림자’와 같은 트로트 고고 넘버들이다. 바로 이러한 곡들이 젊은이들이 원하는 음악과 유행가를 원하는 기성세대들의 기호를 모두 포용하는 절충안이었으며, 가수들의 생존방식이었던 것이다. 안타기획의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은 1970년대 초반 밴드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대표 안치행을 중심으로 행동대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태현(더 맨 출신)과 작곡과 연주를 담당한 김기표(역시 더 맨 출신)의 확고한 체제는 이미 최헌의 ‘오동잎’을 통해 그 가능성을 입증 받았으며, 자신들이 발탁한 윤수일이나 희자매에 이르기까지 국내 음악계의 ‘마이더스 핸드’로 순식간에 부상했다. 그리고 이러한 히트 퍼레이드는 소방차, 박남정, 이규석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2. 국내 밴드 음악의 제2라운드, 1970년대 후반
1977년 MBC-TV에서 시작한 대학가요제는 풋풋한 캠퍼스 밴드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았던 서울대의 샌드 페블스(Sand Pebbles)를 필두로 홍익대의 블랙 테트라(Black Tetra), 항공대의 런 웨이스(Run Ways), 고려대의 코리아 스톤즈(Korea Stones), 중앙대의 블루 드래곤(Blue Dragon), 한양대의 큰 별 등 자신의 학교를 대표하는 캠퍼스 밴드들이 독특한 밴드문화를 형성했으며 그 중심에는 삼형제 밴드 산울림이 있었다. 이들은 이전 세대 밴드들의 사운드와 별개로 특유의 순수함과 아마추어리즘을 앞세우며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1980년 10월 1일자 <동아일보>는 ‘대학가에 그룹사운드 붐’이라는 기사를 통해 대학가요제 열린 77년 이후 급증한 그룹사운드가 학교마다 10여팀 존재하며, 서울에만 5백여 그룹이 활동하고 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에 반해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대마초 파동 이전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국내 락밴드들은 1970년대 후반, 그들이 배출한 가수들의 솔로활동으로 실질적인 힘을 잃었다. 브라운관에서 밴드의 모습은 더 이상 보기 어려웠다. 국내 밴드 음악의 두 번째 라운드는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금 불붙었다. 1979년 <일간스포츠>가 ‘그룹사운드 본격적 활동’이라는 기사에서 “레코드가에서 6년여 동안 인기를 잃었던 그룹사운드가 1978년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 최근 들어 빅히트를 연타하면서 본격적인 그룹사운드 시대의 막을 올렸다.”고 보도한 것처럼 1세대 밴드의 순수 혈통을 이어받은 검은 나비는 땅 밑으로 자신의 위치를 이동시켜 무관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쟈니 브라더스 출신의 멋쟁이 신사 김준에 의해 발탁된 서울 나그네는 사랑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개명하며 발표한 ‘한동안 뜸했었지’로 순식간에 메이저 음악 신을 달궜다. 역시 1세대 밴드였던 데블스는 이은하, 윤승희, 정난이, 정애리 등 여성가수들을 프론트에 배치하고 편곡과 연주를 담당하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여기에 홍콩을 비롯한 동남아에서의 활동으로 탄탄한 기본기를 다진 와일드 캣츠(Wild Cats; 들고양이들)가 귀국해 ‘마음 약해서’를 스매시 히트시켰으며, 역시 미국에서 귀국한 김 트리오가 ‘연안부두’로 합세했다. 이들에게는 동시대 캠퍼스 밴드들과 구분되는 확실한 프로정신과 뛰어난 연주력이 있었다. 이렇게 1970년대 후반은 군웅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를 맞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일으킨 ‘밴드 붐’은 1980년대로 이어진다.
“70년대 초엔 고고붐이 일면서 통기타와 함께 더욱 활기를 띠게 됐고 그룹사운드 경연대회까지 열리는 등 열기가 한층 고조됐다. 왕성하던 그룹사운드는 70년대 중반 대마초 사건이 가요계를 휩쓸면서 된서리를 맞았으며 많은 팀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5~6년 전부터 쇼무대가 퇴조하고 야간무대가 활기를 띠게 되자 헤어졌던 멤버가 재구성, 또는 새로운 팀들이 조직되는 등 그룹사운드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 것.”
- 경향신문, 1982년 8월 20일 ‘가요계 그룹사운드 붐’ 중
‘고고붐’과 맞물렸던 1970년대 초반의 상황처럼, 이번에는 펑키/디스코의 열풍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3. 펑키/디스코, 국내 본격 상륙하다.
잠시 해외로 눈을 돌려보자. 1977년 개봉한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의 포스터에서 보이는 존 트래볼타(John Travolta)의 ‘백바지’와 화려한 미러볼은 그야말로 전 세계를 강타했다. 디스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비지스(Bee Gees)의 음악은 발표하는 족족 빌보드 넘버원을 기록했고, 도나 서머(Donna Summer), 어쓰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 Fire), 쉭(Chic), 에이미 스튜어트(Ami Stewart), 글로리아 게이너(Gloria Gaynor) 등 수많은 스타들의 히트곡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유행의 물결은 어김없이 국내에도 상륙했다.
1978년 9월 26일자 <동아일보>는 ‘디스코 열풍 상륙기미, ‘고고’ · ‘쿵후’ 이후의 새 음악 · 무용’이란 기사에서 “요즈음 미국, 일본 등지의 젊은이들 사이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디스코’ 열기가 곧 우리나라에 상륙할 기세를 보이고 있다. 이미 ‘디스코’ 춤, 음악, 패션 등이 우리나라에 일부 소개된 바 있고 ‘디스코’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가 국내 팬들에게 선보인데 이어 ‘디스코’ 열풍을 업고 ‘디스코’ 구두까지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디스코’ 열풍의 분위기는 점차로 성숙해가는 느낌이다.”라며 “사고방식이 다르고 생활양식에 차이가 있는 우리나라에 ‘디스코’가 미국에서와 같이 젊은이들의 호응을 얻을지는 의심이 가지만 ‘디스코’가 ‘고고’, ‘허슬’, ‘쿵후’에 이은 또 하나의 음악과 춤의 형태로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 등장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망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1979년 1월 17일 TBC-TV ‘쇼는 즐거워’는 진미령, 선우혜경 사랑과 평화가 출연한 디스코 음악의 유래와 특징에 대한 특집 시간을 할애했다. 혜은이는 1979년 1월 1일에서 4일까지 나흘 동안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펼친 리사이틀을 통해 본격 디스코 춤을 선보였고, 이 실황은 TV를 통해 녹화 중계되었다. 희자매는 1979년 1월 28일에서 30일까지 3일 동안 ‘'79 디스코 훼스티벌’이라는 타이틀로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이 공연에는 사랑과 평화가 함께했다. 역시 프랭키 손과 티나 황은 ‘한미 디스코 훼스티벌’이란 타이틀로 1979년 6월 1일부터 10일간 서울, 대구, 부산 등 3개 도시에서 귀국 공연을 가졌다. 톱 탤런트 염복순은 1979년 9월 22일에서 24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최초의 디스코 뮤지컬 ‘땅콩 껍질 속의 연가’에서 주인공 주리 역을 맡았다. 김상희의 ‘밤차로 갑니다’(1978), 이용복의 ‘영일만 처녀’(1978), 송대관의 ‘아내와 같이’(1979) 등 이전 장르에 관계없이 인기 가수들은 제작기 디스코 리듬이 담긴 노래를 취입했으며 큰별자매에서 활동했던 박지영은 1979년 장욱조 작곡의 ‘안녕이라 하지 말고’를 발표하며 솔로로 독립해 이후 도너 서머의 ‘Hot Stuff’를 리메이크한 ‘그 사람 목석’으로 국내 플로어를 뜨겁게 달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앞서 언급한 1970년대 후반 다시 돌아온 밴드 음악의 2라운드가 있었다. 비록 디스코의 국내 상륙에는 ‘음악’보다 ‘춤’에 더 큰 무게가 실려 있었지만, 그 가운데는 펑키 사운드의 밴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혜은이의 ‘제3한강교’와 함께 소위 ‘삿대 춤’의 원조로 불리며 국내 디스코의 인기몰이에 원동력이 되었던 이은하의 ‘밤차’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인 데블스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사랑과 평화, 와일드 캣츠 그리고 김 트리오의 음악은 모두 평키/디스코의 자양분을 듬뿍 흡수한 음악들이었다.
4. ‘안타’에서의 첫 타석 ‘연안부두’, 홈런을 기록하다.
본격 펑키 사운드를 자랑하던 국내 펑키 마스터 사랑과 평화의 음악과는 달리 해외파 뮤지션들인 와일드 캣츠와 김 트리오의 음악은 ‘토착화’ 과정을 겪었다. 이 토착화 과정에 두 밴드의 소속사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와일드 캣츠는 오리엔트, 김 트리오는 안타 기획이다. 두 기획사에는 각각 나현구와 안치행이라는 킹박(박성배) 사단 출신의 기획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기획자는 알려진 바와 같이 시대를 꿰뚫어 보는 혜안으로, 남들 보다 한 발 앞선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를 실제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토착화’란 바로 트로트와 디스코, 록이 결합된 음악이었다. 와일드 캣츠의 노골적인 트로트 지향성은 그들의 대표 트랙과 이후 솔로로 독립한 임종임의 행보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디스코를 표방하긴 했지만 그 무개 중심은 어디까지나 트로트에 기울어 있다는 얘기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조한옥과 은날개와 비슷한 스타일에 살짝 펑키한 리듬이 가미되었다고 할까. 이에 비해 안타 기획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존 밴드출신 가수들의 히트곡들을 양산하면서 이미 트로트 고고의 가능성을 히트로 이어간 경험을 이번에는 밴드 ‘출신’이 아닌 실제 밴드에 적용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김 트리오의 ‘연안부두’다. <일간스포츠> 1979년 11월 7일자 기사 ‘가요계에 트로트 열풍’에 실린 “연안부두는 김트리오가 미국에서 본격적인 디스코 연주를 하다가 귀국한 그룹 사운드라는 점에서 딴 유행리듬에 맞춰 역시 트로트 디스코 스타일로 만들어 트로트 가요가 리듬의 변화나 연주자, 가수에 따라서 얼마든지 현대적으로 소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내용 역시 이를 증명하며, 김 트리오 스스로도 인터뷰를 통해 “팝송이나 재즈 멜로디도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기는 하지만 역시 한국사람 체질에는 트로트 멜로디가 정감이 흘러요. 반주 리듬만 저희가 익힌 디스코로 해서 연안부두는 트로트 디스코인 셈이지요. 오히려 감각적이고 새 맛이 나는 것 같아서 좋아요.”라 밝힌 바 있다.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부터 꾸준하게 인천의 야구팬들의 주제가가 되었던 ‘연안부두’. 연안부두는 인천광역시 중구 연안동에 위치한 인천항 연안부두를 의미한다. 현재 이곳에는 백령도, 대청도, 연평도, 덕적도 등 서해 도서 지역 간 정기 여객선 및 제주도행 초대형 여객선이 오가는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과 중국 등 국제선 여객선이 오가는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이 위치해 있다. <일간스포츠> 1979년 11월 19일자 ‘일요 인터뷰, 가수 김 트리오 ‘귀국 첫 곡이 뜻밖의 히트’’에는 다음과 같은 김 트리오의 인터뷰가 실렸다.
“작년에 완성한 인천의 연안부두가 실물이에요. 당초 이 노래는 만들게 될 동기가 우연이었다고 작곡자에게 들었어요. 방송에 관계하시는 한 가요전문가가 작자미상의 연안부두라는 노래가 인천 연안부두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 노래를 찾기 위해 일주일 동안을 연안부두 근처를 헤맸다고 해요. 그러나 끝내 임자 없이 유행한 노래는 찾지 못하고 작사가 조운파씨가 시를 써서 곡을 만들었어요. 저희는 이 곡을 받아 소화시킬 때 단순한 한 여인의 이별로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아직까지 한국적인 낭만이 깃들어 있는 부두를 배경으로 했지만 그 장소가 버스 터미널도 될 수 있었고, 낙엽 진 어느 공원이 벤치도일수도 있으며 아니면 조용한 살롱일 수도 있다는 일반적인 이별의 의미로 받아들였어요. 가사와 곡에 대한 저희들의 이런 해석이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미 구전되어 오던 노래의 원본을 찾지 못해 다시 만들게 되었다는 얘기다. 가사를 맡은 작사가 조운파는 ‘SK 와이번스 용틀임 마당 김은식 칼럼 - 야구장의 삼십년 합창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가운데 인터뷰에서 “내가 원래 충청도 출신이긴 한데, 학생 시절에 전학을 와서 인천에서 살았어요. 그래서 종종 연안부두에 앉아서 바다를 보내면서 시간을 보내고 했는데, 그 시절에는 인천 연안부두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고, 그래서 고깃배나 섬을 오가는 조그만 배들이 많이 드나들었거든요. 물론 간혹 외국을 오가는 배들도 있었고. 그래서 거기 앉아 있다 보면 이별하는 사람, 감격적으로 해후하는 사람, 망망대해를 그저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또 한 쪽에는 생선 파는 사람, 손님 소매를 끌어당기는 작부, 그런 모습들을 항상 보곤 했죠. 그런 다양한 삶의 애환, 로맨스, 절망, 눈물과 기쁨, 그런 것들이 가슴에 새겨져 있다가 나중에 노래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한 번 써보게 된 것이죠.”라고 밝혔다. 이렇게 ‘연안부두’의 가사가 들려주는 정서 역시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는 트로트 곡의 그것에 맞닿아있다.
이렇게 발표된 ‘연안부두’가 히트를 거두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79년 발표된 이 곡은 발매된 지 3개월 만에 50,000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이듬해 열린 1980년 TBC 방송가요대상 중창부분에 와일드 캣츠, 벗님들, 노고지리, 희자매와 함께 이름을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말 그대로 첫 타석에 들어선 신인 타자가 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5. 김 트리오, ‘연안부두’가 전부는 아니다.
김 트리오를 구성하고 있는 김파, 김단, 김선의 아버지는 8군쇼단 전성기에 트럼펫 연주자로 유명했던 베니 김(김영순)이다. 어머니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히트시킨 가수 이해연. 1973년 미국으로 이민, 그곳에서 김파는 일리노이주에 있는 COD대학을 나왔고, 김단과 김선은 글랜바하 웨스트와 이스트 하이스쿨을 각각 나왔단. 김선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미국에서는 세 명이서 드럼학교 등 개별적으로 각기 다른 악기를 전문적으로 배웠다. 이렇게 익힌 악기는 김파가 기타 베이스, 드럼, 트럼펫, 트럼본, 피아노, 타악기 전반, 김단은 기타, 베이스, 드럼, 트럼펫이고, 김선은 피아노 오르간 무그, 드럼, 플루트, 드럼펫, 타악기 전반. 무대에서는 김파가 드럼을, 김단이 기타를, 김선이 건반을 담당했다.
1979년 3월 30일, 7년 만에 귀국한 김 트리오는 아버지 베니 김과 8군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안치행의 안타기획과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당시 히트의 정상을 달리던 최헌, 윤수일, 희자매 등과 나란히 안타기획을 대표하는 얼굴로 자신들의 위치를 승격시키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는 밴드의 구성원들이 베니 김 쇼를 이끈 베니 김의 자제들이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무엇보다도 이들에게는 ‘연안부두’라는 스매시 히트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한 곡의 히트는 밴드에게 있어서 오히려 마이너스의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를 낳았다. 대중음악시장의 흐름을 꿰뚫고 있던 안치행이 작곡한 ‘연안부두’는 음반에 담긴 그 외의 곡, 그러니까 김 트리오가 추구하던 음악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고, 이 곡과 유사한 후속타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들의 본격적인 음악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앨범에는 이들이 얼마나 진보적인 시각과 탁월한 연주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확인시켜줄 치열한 트랙들로 넘친다.
도발적인 인트로에 이어지는 커팅에 의한 절묘한 기타연주, 쉴 새 없는 드럼의 스티킹을 가진 ‘낙서’는 당시 국내 음악계가 얼마만큼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보석 같은 트랙으로, 동시대 최고의 연주력을 자랑했던 사랑과 평화의 멋진 호적수가 되었을 만큼 진보적인 곡이다. 키보드를 담당한 홍일점 김선이 직접 작사, 작곡을 담당하고 노래까지 부른 발라드 넘버 ‘저 하늘 끝까지’는 검은색이 물씬 풍기고, 김파가 작곡한 ‘살짜기 말하겠어요’는 ‘연안부두’와 유사한 타령조의 곡이긴 하지만 그 연주에 있어서는 펑키 밴드 특유의 상큼함이 넘친다. 대중성과 음악성을 골고루 섭렵한 김기표가 작곡한 ‘꿈속의 님아’는 선이 굵은 슬랩 베이스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베스트 트랙.
물론 위에서 ‘연안부두’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했지만, 결코 이 곡을 폄훼하려는 의도로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한 곡으로 인해 한 밴드의 음악성을 평가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의미라고나 할까. 김 트리오는 이 앨범 이후 막내 김선이 선이라는 이름으로 솔로로 독립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렇게 준비한 곡들은 이듬해인 1980년 발표된 김 트리오의 두 번째 음반에 수록된다. 때문에 두 번째 음반은 첫 번째 음반과 달리 김선의 보컬로 이루어진 곡이 많고, 편곡도 화려하다. 이 외에 다른 안타기획 소속 뮤지션들과 함께 캐롤 음반 한 장이 존재한다. (20140209)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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