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일 밴드 1집 / ‘고독한 도시 남자’ 윤수일 그의 음악적 특징을 규정짓는 본격적인 출발점

 

 

초등학교 시절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윤수일은 5학년 무렵부터 자신의 친구는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기타를 잡았다. 윤수일은 이후 인터뷰에서 “말없는 친구. ‘튀기’나 ‘양키’라고 놀리지도 않고 내 슬픈 마음을 달래주는 기타야말로 더할 수 없는 귀중한 친구가 됐습니다”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울산에서 학성고등학교 2학년 때 밴드를 조직해 ‘Let It Be’를 비롯한 비틀즈(The Beatles)의 곡들을 주된 레퍼토리로 삼았던 윤수일은 펄벅 재단의 도움으로 울산공대 건축과에 진학했지만, 당시 서울에서 밴드를 하고 있는 혼혈 가수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향했다. 그 밴드는 바로 골든 그레입스(Golden Grapes). 건축과에 진학한 건 당시 미국에서 건축 설계사로 있던 숙부가 권유했기 때문이지만, 학업을 다 마치기 전 가수로 진로를 택한 것이다. 결국 윤수일은 1975년, 펄벅 재단 고아원 출신의 함정필, 함중아 형제를 중심으로 신중현이 기획한 밴드 골든 그레입스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다. 그리고 기타와 보컬을 맡으며 밴드에 합류했다. 전임자인 함중아와 같은 포지션이었다. 이후 1976년 안타 기획에서 주최하고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며 가요계 정식 데뷔의 기틀을 마련한 후, 1977년 [윤수일과 솜사탕]의 유일한 음반에 수록된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히트시키며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한다. ‘사랑만은 않겠어요’는 MBC 인기가요와 TBC 베스트 세븐에 연 7주 이상 정상의 자리를 밟았다. 당연히 안타기획의 작품이다. 이 곡으로 이듬해 KBS-TV와 TBC-TV 최고 인기 신인상 수상을 수상했으며, MBC 10대 가수상 및 최고 인기 가요대상을 수상했다. 

 

안타기획은 최헌의 ‘오동잎’이라는 스매시 히트곡을 발표하며 1970년대 중반 이후 불어 닥친 소위 트로트 고고의 유행을 견인했던 기획사다. 그들의 레이더에 두 번째로 윤수일이 잡힌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윤수일은 안타기획에 발탁될 때부터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부를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인터뷰에서 윤수일은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지만, 어떤 신인 가수라도 최헌의 성공사례를 본다면 안타기획의 제안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안타기획의 대표 안치행이 구상한 가요계의 밑그림은 마치 퍼즐을 짜 맞추듯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잠시 당시 신문의 기사를 보자.

“(전략) 그런가하면 최헌을 「오동잎」으로 히트하게 하고 스타가수로 만든 안치행 역시 30대 젊은 작곡가. 그는 보우컬그루웁 영사운드와 함께 「달무리」 「등불」 등을 내 놓은 뒤 「오동잎」을 내놓아 히트시켰는데 윤수일이 불러 히트하고 또 역시 그를 스타가수 자리에 올려놓은 곡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내놓았는가하면 최근 최헌이 다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앵두」나 「구름 나그네」 「세월」 등 계속 히트곡을 내놓아 가요계의 기린아로 나서고 있다. (중략) 그러나 재미있는 현상은 길옥윤, 김기웅 등이 보다 격조를 찾는 세미클래식 쪽을 지향하고 있는 반면 30대 젊은 작곡가들은 여전히 복고조의 트로트풍 노래를 만들고 있어 대중 복고 취향이 아직도 두터움을 짐작케 한다.” (동아일보 1978년 6월 9일, <가요 작곡계에 30대 선풍>)

수용층의 취향을 꿰고 최헌과 윤수일을 순식간에 히트시킨 트로트 고고의 젊은 작곡가 안치행의 행진은 후속곡들로 이어졌다. 최헌은 1978년 ‘구름 나그네’, ‘앵두’, ‘순아’를 발표했다. 또 윤수일은 ‘갈대’(1978), ‘추억’(1978), ‘나나(’1979), ‘유랑자’(1980)를 차례로 히트시키며 최고의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함은 물론, 준수한 외모와 곡에 맞는 스타일로 트렌드 세터로서의 존재감도 부각시켰다.

 

물론 이러한 히트곡이 윤수일이라는 스타 가수를 만들어냈지만, 윤수일이 언제나 혼자서 무대를 꾸민 건 아니었다. 1979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혼혈 연예인들만의 이색무대>라는 기사를 보자.

“혼혈아들만이 나와 노래와 춤 연주 등을 선보이는 색다른 쇼 무대가 펼쳐진다. 오는 14, 15일 이틀 동안 매일 오후 1시, 4시, 7시 서울 문화체육관에선 「불우 혼혈인을 위한 친구들의 축제」라는 이름의 쇼 무대가 펼쳐져 이 수익금은 혼혈아들 자신의 복지기금으로 쓰여진다. 이 쇼 무대를 마련하는 데는 「한국혼혈인회」(회장 정동권 29). (중략) 이 쇼 무대엔 「사랑만은 않겠어요」 「갈대」 「추억」으로 가요계 정상에 도전하고 있는 윤수일, 「잘가요」로 요즘 한창 인기인 박일준, 「안개속의 두 그림자」 「잊을 수 없는 사람」의 함중아, 「순이 생각」의 샌디 김 등이 나서는가 하면 「실버들」을 부르고 디스코 춤 그룹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희 시스터즈의 김인순 등이 모두 출연한다. 뽀빠이 이상용이 특별 출연해 사회를 보고 윤수일이 이끄는 「솜사탕」 함중아가 이끄는 「초록별」 등 그룹사운드들이 나서 연주를 들려준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어떤 계기에 의해 솔로 가수로 커다란 히트를 기록했을망정 처음 음악을 시작하던 당시 밴드 편성의 시스템이 어쩌면 윤수일에게는 몸에 맞는 수트와도 같이 어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트로트 고고의 유행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요계의 흐름이 다시 바뀐 것이다. 

 

해금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조용필의 음악은 이미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상당부분 동떨어진 것이었고, 신중현은 대규모 밴드 뮤직파워와 함께 기존에 발표했던 ‘아름다운 강산’을 새롭게 편곡해 앞세우며 말 그대로 ‘금의환향’했다. 송창식과 윤형주는 또 다른 스타일로 돌아왔다. 대학가요제 출신의 풋풋한 학생들은 어엿한 가수가 되어 젊은 나이의 팬 층을 공략했고, 일본에서 돌아온 김연자는 본격적인 트로트로 바람을 일으켰다. 경향신문은 1981년 3월 2일 <가수 인기판도 달라졌다>라는 기사에서 최헌은 신년 들어 2주 만에 20위권에서 사라졌으며, 윤수일의 경우에는 이미 이름이 보이지 않은지 오래됐다고 보도했다. 어찌 보면 마이더스의 손을 자랑하던 안타기획도 당황할 타이밍이었다. 다시 같은 해 경향신문 4월 11일자 신문 <남성 트리오 솔개>라는 기사를 보자.

“77년 최헌의 「오동잎」을 스타트로 하여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인 빅 셀러를 내 「PD 메이커 전성시대」를 몰아왔던 작곡가 안치행씨. 그가 근년의 슬럼프에서 탈피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20대의 남성 트리오을 픽업했다. (중략) 그래서 이들이 내놓은 데뷔곡도 로크계열의 「연극 중에서」라든지 트로트풍의 「아직도 못다한 사랑」을 비롯, 레게 리듬 앤드 블루스, 컨트리, 포크, 프로그레시브 등 모든 가요형식을 망라하여 다채로움을 과시했다.”

가요계가 다양화된 만큼 안타기획 역시도 폭 넓은 음악을 소화하려는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기사다. 그리고 앞선 기사에서 윤수일의 이름이 보이지 않은 지 오래됐다는 보도는 다시 말해, 윤수일이 무언가 다른 의도를 행동으로 옮기던 시기였음을 알려준다. 바로 초창기 자신의 출발점인 밴드 음악,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락 밴드였다. 1981년 4월 윤수일 밴드의 첫 번째 음반이 발매된 것이다. 물론 최헌도 1978년 호랑나비에서 음반 한 장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음반 발표 후 곧바로 솔로로 다시 돌아온 일종의 외도가 아니고 윤수일은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밴드를 조직한 건 1980년 11월이다. 그러면 1981년 국내 락계의 동향을 잠시 살펴보자. 

 

1980년 대학가요제에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한 마그마가 유일한 음반을 발표했고, 대학가요 경연대회에 출연해 화려한 스테이지 매너와 현란한 기타연주로 주목받았던 작은거인이 국내 하드락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로 꼽히는 두 번째 음반을 발표했다. 또 산울림은 군에 갔던 김창훈과 김창익이 제대하며 완전체의 모습으로 정규 7집을 발표했다. 여러 스타일이 혼재했지만, ‘님타령’이라는 색다른 시도를 앞세운 시인과 촌장 데뷔앨범이 나왔다. 양병집에 의해 발탁된 동서남북은 프로그레시브락 경향의 음반을 발표했고, ‘망부석’과 ‘송학사’로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던 김태곤은 1981년 발표한 세 번째 음반을 통해 보여준 것 역시 국악과 접목된 프로그레시브락이었다. 조용필 3집에는 밴드 위대한 탄생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고추잠자리’라는 세련된 락 넘버가 수록되었다. 하지만 마그마, 작은거인과 같이 대학가요제 출신 밴드들의 경우 그 활동 영역이나 범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시인과 촌장, 동서남북과 같은 언더그라운드 밴드이 설 수 있는 무대는 더 적었다. 물론 산울림과 같은 경우 6집까지 발표했던 많은 히트곡들로 인해서 앞서 언급한 밴드들보다는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그 사랑에 있어서 많은 부분은 그 때 까지도 어쩌면 프로냄새가 많이 나지 않는 신선함 때문이었다. 메이저라고 할 수 있는 김태곤의 음반에서 히트한 곡은 락적인 성향의 곡이 아니라 ‘아야 우지마라’였으며, 조용필은 같은 음반에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와 같은 트로트 히트곡이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윤수일 밴드의 첫 번째 음반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지금 들어보면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이 ‘별종’의 음반이었다. 마치 외톨이였던 윤수일의 과거처럼.

 

윤수일 밴드로 활동한 뒤 윤수일이 했던 인터뷰를 찾아보면 “솔로로 활약하다 보니 노래가 자꾸 트로트형식으로 흐는 것 같아 노래 자체에 대한 재미를 찾을 수가 없었고, 밴드가 함께 연구하고 조언함으로써 스스로 음악적인 발전을 꾀한다는 점에서는 그룹의 매력을 떨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의 이름을 밴드의 이름으로 사용했지만, 멤버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1집에 참여한 멤버들은 윤수일 외에 조규문(기타), 김철제(피아노), 이진수(베이스), 이희영(키보드) 그리고 남영욱(드럼)이다. 물론 음반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은 윤수일이 만든 곡이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밴드 구성원 모두의 합이 하나를 이뤘다는 사실은 첫 곡 ‘떠나지 마’를 들으면 쉽사리 이해가 된다. 이전까지 있었던 국내 밴드들 가운데 보컬리스트의 이름이나 리더의 이름이 들어갈 경우, 다른 파트들은 그를 위한 ‘반주’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하지만, 윤수일 밴드는 그 이름에서 윤수일이라는 이름을 빼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철저하게 밴드 지향적이다. 윤수일 역시 바로 몇 개월 전 그의 모습이 ‘10대 가수’이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리려는 듯 후반부에서 목소리에 스크래치를 잔뜩 넣어 보다 락킹한 보컬을 구사하며 ‘솔로가수 윤수일’과는 확실한 선을 긋고 있다. 

 

윤수일의 음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도회풍’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음악적 특징은 앞서 발표했던 안치행이 만든 곡이 아니고 윤수일 자신이 만든 음악이 본격적으로 수록된 이 앨범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게 좋다. 그래서인지 피아노 연주와 스트링의 차가움이 격정적인 기타와 오르간으로 발전하는 ‘마지막 찻잔’과 1978년 발표한 ‘꿈이었나봐’의 간격은 가까운 듯 멀다. ‘제2의 고향’은 이 음반을 대표하는 히트곡으로, 두 번째 음반에도 한차례 더 수록되었다. KBS-TV '가요톱텐'에서 1981년 11월 10일과 17일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던 만큼, TV를 통해서도 자주 볼 수 있던 이 곡. 노래하는 윤수일 곁에 선글라스를 낀 베이스 연주자와 기타 연주자가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하나의 마이크를 향해 노래 부르는 장면은 국내 다른 밴드의 연주 모습에는 볼 수 없던 장면이었다. 윤수일 밴드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을 땐 분명 이러한 스테이지 모습들도 철저하게 연습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모습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 아마도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였을 것이다.

 

로드 스튜어트의 1980년 앨범 [Foolish Behaviour]에 수록된 ‘Passion’은 빌보드 차트에서도 맹위를 떨쳤지만, 국내에서도 커다란 사랑을 받았다. 윤수일 밴드 1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침묵’은 바로 로드 스튜어트의 ‘Passion’에 우리 가사를 붙인 곡이다. 물론 이 한 곡으로 윤수일 밴드에게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당시 TV에 나오는 윤수일 밴드의 모습, 그리고 의상과 스타일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노래속의 세련된 목소리답지 않게 걸쭉한 톤의 윤수일은 「엘비스 프레슬리」 「로드 스튜어트」 등의 흉내를 낸다는 말을 듣고 있지만”이라는 당시 기사를 들쳐보지 않더라도 말이다. 윤수일의 음악이 ‘도회풍’이라고 앞서 이야기했지만, 또 한 가지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고독’이다. ‘비’는 빗소리와 천둥소리 효과음에 트윈 리드기타와 오르간의 블루지한 진행을 가지고 있지만, 블루스 특유의 끈끈함이 아니고 가사에 등장하는 것처럼 ‘메마른 고독함’이 묻어난다. 그건 ‘도회풍’의 느낌과도 다름 아닐 것이다. 말 그대로 윤수일의 음악은 고독한 도시 남자의 음악이다. 그리고 윤수일 밴드의 데뷔앨범은 윤수일의 이러한 음악성을 규정짓는 시작점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이후 1982년 들어 김철제와 남영욱을 방출하고 드러머 오준열을 맞아들이며 발매한 두 번째 음반을 통해 현재까지도 애창되는 ‘아파트’와 ‘토요일 밤’, ‘돌아와’를 발표하며 인기의 행진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음반부터 확실하게 안타기획에서 벗어나 확실하게 독창적인 행보를 시작한다. 1984년, 다시 윤수일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교체되어 박성호(기타), 조용식(베이스), 최정식(키보드), 이건태(드럼)로 밴드를 재정비하고 발표한 세 번째 앨범에서는 ‘아름다워’와 ‘사랑의 빛’을, 이듬해 발표한 다섯 번째 앨범에서는 ‘환상의 섬’과 ‘믿었어요’를 가요 순위 차트에 랭크시켰다. 4집 앨범에서는 최정식과 이건태 대신 김지훈과 황종수가 각각 키보드와 드럼을 담당했다. (20150317)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