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사람들 : ‘에밀레’ 주변의 동네 주민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서른 즈음에’의 강승원을 리더로 당시 유준열과 김혜연, 김은조, 고은희 그리고 심재경으로 구성된 일종의 노래 모임이다. 심재경은 1983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로 대상을 차지한 서강대 동아리 에밀레의 1기 멤버고, 현재 그의 아내인 김혜연 역시 그보다 3학번 후배인 86학번으로 에밀레 출신이다. 에밀레는 서강대 79학번 강승원이 한 학번 선배 김광엽과 함께 1983년 만든 동아리다. 그 해 에밀레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심재경이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가 바로 김광엽이 작곡한 곡이다. 1983년 MBC 대학가요제에는 유준열 역시 이후 동물원에서 함께 활동하게 되는 박경찬과 함께 ‘망부가’로 본선에 진출했다. 유준열과 강승원은 대학가요제에서 만난 적이 있지만 당시는 잘 모르는 사이였고, 강승원이 에밀레에서 노래할 때 선배의 소개로 유준열이 게스트로 출연한 걸 계기로 함께 활동하게 됐다.
고은희는 홍익대 노래 동아리 뚜라미의 멤버로 1984년 MBC 대학가요제에 이정란과 함께 참여해 ‘그대와의 노래’로 입상했고, 이후 고은희 이정란으로 발표한 독집 음반의 ‘사랑해요’, 이문세와 함께 부른 듀엣곡 ‘이별이야기’로 잘 알려진 멤버. 그녀의 남편 오성환 역시 서강대 에밀레 출신이다. 음반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에밀레에서 활동했던 김고은(김창기의 여동생)과 박상욱 등도 객원멤버로 활동한 바 있다. 음반 수록곡 가운데 ‘미안해’의 연주자들은 미국 출신 밴드이고 나머지 곡 중 외국인이 연주한 곡은 모두 당시 조선호텔에서 연주하던 호주 출신 밴드로 강승원과 만나게 되어 음반 제작에 참여하게 됐다.
우리 동네 사람들 : 주민들의 아지트 ‘노래 은행’
서강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강승원은 미국으로 건너갔다 돌아와 1990년에 세검정 인근에 스튜디오 ‘노래 은행’을 만들었다. 동물원 3집 [동물원 세 번째 노래모음](1990)은 바로 여기서 녹음됐다. 이 음반의 크레디트를 살펴보면 어쿠스틱 기타에 참여하고 있는 유준열, 강승원 그리고 심재경의 이름이 보인다. 강승원은 믹스다운 엔지니어로도 참여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의 음반이 제작된 건 1994년 12월이지만 어쩌면 그 밑그림이 그려졌던 시기는 이 때로 볼 수도 있겠다. 강승원과 유준열은 1992년 콘서트를 가진 후 대학로 학전 소극장을 중심으로 꾸준한 공연을 펼쳤으며, 당시 작은 음악회들에서 음악 감독을 시작한 그의 이력은 이후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를 필두로 ‘이소라의 프로포즈’, ‘이하나의 페퍼민트’를 거쳐 현재(2015년) ‘유희열의 스케치북’으로 이어지고 있다.
강승원의 스튜디오 노래 은행은 비록 5~6년밖에 운영되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었지만, 그곳을 아지트로 예전의 음악 친구들이 하나씩 모이기 시작했다.
“당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같이 대학가 출신 보컬이 많이 참여해, 곡마다 부르는 컴필레이션 앨범에서 ‘사람들’이란 명칭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XX 사람들’로 우선 정해놓고 앞 명칭을 어떻게 할 것인가 멤버들과 의견을 나누다가 그중 ‘우리 동네’로 결정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 모임의 이름이 이렇게 ‘우리 동네 사람들’로 결정되며, 당시 LG미디어에 다니던 문대현(‘광야에서’의 작곡가)의 제안은 강승원의 솔로 앨범이 아니라 우리 동네 사람들의 유일한 음반 [우리 동네 사람들 하나](1994)로 발전되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 : 하나
음반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클래시컬 기타로 이끌어가는 보사노바 풍 나른한 진행과, 맨하탄 트랜스퍼(Manhattan Transfer) 스타일의 풍성한 보컬 하모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뜸드뜸드’나 ‘야!’와 같이 플루겔혼, 트럼펫이 이끄는 스윙감 넘치는 축제 풍 반전은 음반 전체에 악센트를 부여한다. 이번 재발매를 통해 뒤늦게나마 희귀음반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던 까닭에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던 ‘서른 즈음에’의 끈끈한 원형이나, 동물원 1집(1988)과 역시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1](1993)에 수록됐던 ‘말하지 못한 내 사랑’의 고은희와 그녀의 목소리를 둘러싸고 있는 김은조, 김혜연의 화음 버전을 들을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서른 즈음에’는 강승원이 31살에 만든 곡이다. 본인은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습니다. 원래 공들여 만든 곡은 실패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만든 곡이 히트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라고 이야기하지만, 어느덧 우리 시대의 명곡이 되었다. 물론 강승원의 콘서트에서 이 곡을 들은 김광석의 부탁으로 노래를 주게 됐고, 그의 네 번째 음반(1994)에 몇 개월 먼저 수록했지만 원곡의 느낌은 그의 버전과는 또 다르다. 강승원은 김광석의 버전에 대해 “크게 기대는 안했습니다. 음반이 발표되고 처음에는 히트가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히트를 하게 되어 기분이 좋았습니다”라고 밝힌바 있다.
음반이 제작된 시기 탓인지 전조된 ‘징글 벨’의 테마가 살짝 스쳐가는 ‘우리 동네 사람들’의 “끝”이라는 가사로 10곡의 수록곡은 모두 끝이 난다.
우리 동네 사람들 : 각자의 동네로 돌아가다.
앞서 이 음반의 전체적인 특징이 나른한 진행과 풍성한 보컬 하모니라고 이야기했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맥은 또 하나 있다. 바로 ‘소박함’이다. 이는 미니멀한 악기편성이라는 외관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참여한 뮤지션들의 음악적 성향 혹은 음반을 진두지휘한 강승원의 의도로 보는 편이 맞을듯하다. 언뜻 언뜻 고찬용과 이소라가 있었던 낯선 사람들의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라면 바로 소박함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아마추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프로도 아니었던 당시 우리 동네 사람들의 위치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우리 대중음악계는 화려함의 시대였다. ‘잘 빠진’ 앨범이었지만 자극적인 부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음반에 대중들의 레이더는 쉽게 반응하지 않았다. 심재경과 유준열이 대학가요제에 참여한지 11년, 고은희가 대학가요제에 참여한지 10년 만에 나온 음반이며 강승원이 실질적으로 처음 그의 이름을 뮤지션 크레디트에 올린 음반은 결국 음반사가 문을 닫은 이후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음반이 되어 버렸다.
“2집을 발표할 생각은 있었으나 멤버들이 뿔뿔이 흩어져 다음앨범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1집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면 흩어지지 않았겠지요.”
강승원이 이야기하는 우리 동네 사람들 해체의 변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 : 주민들, 20년 뒤 다시 동네를 찾다.
그리고 2014년, 강승원과 심재경의 독집에 대한 기사가 났다. 꾸준한 음반활동을 한 것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발표하는 첫 번째 음반들이다. 2015년엔 우리 동네 사람들이 발표했던 유일한 음반도 LP로는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된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건 뮤지션의 몫이지만, 그 노래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청자들의 몫이다. 어쩌면 강승원과 심재경이 20년 뒤 다시 솔로 음반을 발표한 것이나, 우리 동네 사람들의 재발매의 경우 모두, 노래를 만든 이도 부른 이도 노래의 가사처럼 “스물에다 둘을 더한 그런 나이”(‘지금 내 나이’)도 그렇다고 “서른 즈음”(‘서른 즈음에’)도 아니지만 그들이 발표한 노래는 계속해서 그 나이가 되는, 또 그 나이를 보낸 이들의 ‘송가’가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고가의 보석이 아니라, 남 몰래 숨겨둔 나만의 보물과도 같이 소중한 음반이다. (20150907)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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