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커피 한잔
02. 떠나야할 그 사람
03. 빗속에 여인
04. 님아
05. 봄비
1971 / 유니버어살
사실 김희갑이라는 이름은 수많은 히트곡을 생산했던 작곡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그는 그 이전에 미 8군 에이원 쇼(A1 Show)의 악단장과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키 보이스, 히 파이브, 트리퍼스 등 초창기 한국 록 밴드들의 활동에 작곡과 음반 프로듀서로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소위 ‘김희갑 악단’의 이름으로 발표한 음반들을 통해 들려준 그의 기타 연주는 동시대 활동했던 신중현, 이인성과 같은 기타리스트와 비교할 때 비브라토를 최대한 억제하고 해머링과 풀링, 혹은 슬라이드로 정갈한 멜로디를 이끌어 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그 기본이 클래식 기타에 있기 때문이다. 또 여타 기타리스트들이 발표한 연주음반들과 달리 기타의 솔로 연주보다는 악기 전체의 조화를 중시하는 ‘악단장’으로서의 역량도 두드러진다. 1971년에 공개된 이 음반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전작들과는 확실하게 다른 구석이 있다.
우선 밴드를 구성하고 있는 멤버들이 다른 음반에 참여했던 김희갑 악단 구성원이 아니다. 기타 김희갑, 드럼 김인성, 콩가 유복성, 올갠 박남수, 봉고 전병찬, 베이스 기타 경윤, 앨토 색소폰 강승용으로 새롭게 조직된 프로젝트. 일단 드럼과 콩가, 그리고 봉고로 구성된 타악기군이 눈에 띈다. 또 이전에 김희갑 악단이 발표한 음반의 레퍼토리였던 기존 트로트 히트곡이나 김희갑 자신이 작곡한 곡을 수록한 게 아니라 신중현의 대표적인 히트곡을 담고 있다는 차별성도 존재한다. 필을 중요시하는 신중현의 연주와 정교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연주를 하는 김희갑의 스타일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김희갑은 이러한 차이를 좁혀가는 대신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 부각시키며 흥미로운 해석을 감행했다. 우선 기타리스트 김희갑은 전체적으로 애들립과 같은 즉흥성을 철저히 배제시켰으며, 악단장으로서의 김희갑은 밴드를 구성하고 있는 악기들이 내는 한 음 한 음의 소리를 마치 수학 문제를 풀 듯 계획적으로 치밀하게 배열했다. 기타 사운드는 차갑고 냉철하지만 세 명으로 구성된 타악기군은 원시적이고 뜨겁다. 기타는 물론 타악기를 제외한 모든 악기는 솔로 파트를 병행해 맡으며 자유롭고 역동적인 생명을 부여한다.
때문에 이 음반은 즉흥적이고 사이키델릭하다. 물론 그 사이키델릭의 의미가 약에 취해 놀아나는 듯 보이는 기존 곡들과는 다르다. 즉흥성 역시도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계획된 악보 아래에 있지만 청자들은 반복되는 타악파트의 중독성 강한 리듬에 쉽사리 무력화되고 중심을 잃는다. 셔플과 국악의 굿거리장단이 공존하는 독특한 편곡을 들을 수 있는 <커피 한 잔>과 <빗속의 여인>은 기존 신중현의 원곡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들어봐야 할 문제작이며, <떠나야할 그 사람>의 중반부에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김희갑의 기타 애들립이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빗속의 여인>는 1970년대 초 국내 록 밴드에게 있어서 산타나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편곡을 가진 곡으로, 타악기군의 중독성 강한 연타는 비슷한 시기에 키 브라더스가 발표한 「고고 춤을 춥시다」처럼 산타나의 <Jingo> 리듬파트를 그대로 옮겨왔다. 와우 이펙트를 사용한 김희갑의 기타가 후방 배치된 <봄비>는 기타 이외의 악기가 멜로디를 리드하는 이색적인 트랙.
출중한 연주기량을 가진 연주인들과 함께 한 프로젝트 형식의 밴드였지만 록 밴드 지향적인 김희갑의 의도가 오롯이 담긴 음반으로, 신중현 자신의 음반은 물론 신중현의 곡을 연주한 다른 연주음반들 가운데서도 단연 손가락에 꼽을만한 호연의 기록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김희갑의 의도 혹은 외도는 오직 이 한 장의 음반밖엔 없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마저도 지금까지 재조명 받지 못하고 재발매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잊혀지고 있다.
글 송명하 (20120125)
* 월간 핫트랙스 매거진(http://info.hottracks.co.kr/company/main)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