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음반에 대한 복선
2011년 11월 23일 플라시보(Placebo)는 자신들의 페이스북 페이지와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스튜디오로 돌아가 2012년 발표할 새 앨범을 준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미 올해 열렸던 여러 페스티벌 무대를 통해 선보인 바 있는 타이틀트랙 ‘B3’를 비롯 4곡의 신곡과 한 곡의 리메이크곡을 수록한 이번 EP. 풀랭쓰의 정규앨범이 2013년으로 미뤄졌기 때문에 이후 발표될 새로운 음반에 대한 복선의 의미에 새로운 레이블에서의 활동에 대한 첫 단추라는 의미 또한 부여할 수 있을 것이며, 2000년대에 접어들며 정확하게 3년에 한 장씩 정규음반을 발표한 이력을 살펴볼 때 나와야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밴드의 의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레이블의 이적 외에 밴드에 있어서 큰 변화는 그다지 없다. 지난 음반부터 새롭게 스틱을 잡은 스티브 포레스트(Steve Forrest)가 계속해서 드러머의 자리에 앉아있으며, 처음 결성 때부터 든든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프론트맨 브라이언 몰코(Brian Molko, 보컬/기타)와 스테판 올스달(Stefan Olsdal, 베이스) 역시 건재하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지난 음반의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데이비드 보트릴(David Bottrill)와 함께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와의 작업으로 알려진 애덤 노블(Adam Noble)이 프로듀서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음반에 수록된 5곡은 각각 애덤 노블이 한 곡(B3), 플라시보 자신이 두 곡(I Know You Want To Stop, I.K.W.Y.L), 그리고 데이브드 보트릴이 두 곡(The Extra, Time Is Money)씩 프로듀스를 맡았다.
지금까지 플라시보가 발표한 음반을 살펴볼 때 수록곡 가운데 첫 번째 트랙은 전체적인 음반의 성격을 규정짓는 커다란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데뷔앨범은 비록 환상적인 노이즈 사운드의 ‘Nancy Boy’로 주목을 받긴 했지만, 음반의 전체적인 색깔은 첫 번째 트랙인 ‘Come Home’에서 들을 수 있는 상큼한 기타팝 사운드였으며, 두 번째 음반 [Without You I'm Nothing]의 ‘Pure Morning’ 역시 글램록과 펑크를 자신의 음악에 적극적으로 수용한 음반 전체를 설명하는 트랙과도 같았다.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의 ‘Block Rockin' Beats’를 샘플링에 이용하며 댄서블한 일렉트로닉 사운드 사운드를 만들어 낸 ‘Taste In Men’이 수록된 [Black Market Music]은 물론 이례적으로 역동적인 연주곡 ‘Bulletproof Cupid’가 머리곡의 위치를 차지한 [Sleeping With Ghost]의 다이내믹한 록사운드가 그랬다. 아예 음반과 동명의 타이틀곡을 맨 처음에 배치한 [Meds]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비록 EP이긴 하지만 이번 음반 역시도 첫 번째 트랙에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이번 음반의 첫머리에 자리 잡은 곡은 이미 올해 열렸던 몇 차례 대규모 페스티벌 무대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었으며, 유튜브와 같은 스트리밍 사이트를 통해 그 실체가 공개되기도 했던 타이틀트랙 ‘B3’다. 이 곡에서 플라시보는 2집 이후 밴드의 가장 커다란 사운드적 특징으로 자리 잡은 일렉트로-펑크와 독보적인 멜로디의 결합을 여유로운 현재의 플라시보와 결합시키며 더욱 확장적인 포용성을 자랑한다. 전작 [Battle For The Sun]이 초기 사운드로의 회귀를 주창하며 등장하며 ‘Nancy Boy’의 스트레이트하고 강한 록사운드와 밝은 멜로디라인을 연상시켰다면, 이번 EP는 그동안 플라시보가 시도했던 모든 음악들의 총집편과 같이 다채롭다. ‘I Know You Want To Stop’은 밍서스(Minxus)가 1995년에 발표한 원곡에 크게 손을 대지 않은 듯하지만, 오히려 노이지한 부분이 걸러지고 브라이언 몰코 특유의 보이스 컬러가 가미되며 원래 주인이 플라시보의 것인 냥 여타 수록곡들 사이에서 이물감이란 찾아볼 수 없다. 시퀀스와 같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패턴에 얹히는 어쿠스틱 기타의 부드러운 감성의 공간을 찌르는 날카로운 피아노, 엔딩 부분의 불안한 듯 이어지는 멜로트론이 견고한 건축 구조물과도 같이 단단한 결정을 이루고 있는 ‘The Extra’는 주술적인 몽롱함으로 안내하는 트랙. 1998년 명반 [Without You I'm Nothing]에 수록되며 밴드의 추종세력을 횡적으로 확장시키는 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던 ‘Every You Every Me’에 매료된 기억이 있다면 거부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중반부 덤덤한 진행을 가진 ‘I.K.W.Y.L’는 압도적인 후반부 노이즈 사운드로 발전되어간다. 그런가 하면 데뷔앨범에서 들려준 상큼하고 풋풋한 기타팝 스타일의 차용은 부드러운 ‘Time Is Money’에서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지만 점층적으로 발전되는 사운드 속에서 2집 이후 밴드의 가장 커다란 특징 가운데 하나인 음울한 보컬의 멜로디 라인이 중첩된다. 같은 프로듀서와 작업한 탓인지 전작의 엔딩곡인 ‘Kings Of Medicine’과 일정부분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지만, 여러 악기들이 복잡하게 얽히지 않는다. 피아노를 전면에 내세운 플라시보식의 피아노 록을 선보인다고 할까.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내는 보컬의 코러스와 함께 긴 여운을 남기는, 음반에서 가장 긴 러닝타임을 가진 곡이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지금까지 플라시보가 지금까지 발표해온 6장의 정규음반들은 각각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밴드는 그러한 특징을 위해 모든 스튜디오 음반들에 다른 프로듀서와 작업을 해 왔다. 물론 이러한 변화들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분명 ‘표면적’이었을 뿐, 데뷔앨범 이후 지난 [Battle For The Sun]까지 플라시보의 음악의 굵은 혈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 굵은 혈맥이란 바로 이들만의 탁월한 멜로디 라인이다. 이 플라시보식의 탁월한 멜로디라인은 초기 기타팝에서 일렉트로닉, 랩, 혹은 오케스트레이션 등 그 표현 방법에서의 차이만 존재할 뿐 그 근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행보를 보여 왔다는 이야기다. 그들의 음악은 가벼운듯하지만 경박하지 않고 무거움 가운데서도 숨 쉴 만한 틈새를 공유한다. 음울하지만 염세적이지 않고 팝퓰러한 듯 심오하다. 사실 발표한 모든 음반이 수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세일즈 면이나 기타 여러 가지 면에서 밴드의 역사에는 굴곡이 있어 왔다. 여기에는 출발과 동시에 청자들의 귀를 매료시켰던 초기 사운드의 깊은 인상이 남긴 잔향이 그만큼 컸던 이유 역시 빠트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밴드 역시도 양지하고 있던 탓인지, 어쨌거나 전작 [Battle For The Sun]은 여러 부분에서 초창기를 연상시키는 흥분을 맛보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EP [B3]에는 단순히 초심으로 돌아가 과거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연륜이 묻어난다는 이야기가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이들에게 원숙함이라는 배지를 달아도 될 만한 여유로움까지 담았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소닉 유쓰(Sonic Youth), 벨벳 골드마인(Velvet Goldmine)은 물론 글램록, 펑크, 기타팝, 일렉트로닉, 팝, 얼터너티브 록, 긴장, 이완, 몽환, 중독, 음울 등 플라시보와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수많은 단어들이 원숙이라는 단어 아래에서 모이고 또 흩어지며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내년에 정규음반이 발표된다고는 하지만, 다섯 곡이라는 EP의 수록곡은 그 때를 기다리기에 너무 부족하다. 어서 풀렝쓰의 정규앨범을 만나고 싶다. [B3]는 청자들에게 그런 기대를 갖고 조바심을 만들기에 충분한 음반이다.
글 송명하 (월간 파라노이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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