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음악 암흑기, 새로운 대중 음악씬의 태동
대학가요제
1973년의 장발단속 본격화, 1975년 ‘긴급조치 9호’ 발동에 의한 공연 예술 검열의 강화와 국내, 외 곡 500여곡의 금지곡 지정, 같은 해 11월부터 단행한 대마초 사범 단속. 이상 열거한 일련의 사건 아닌 사건들은 국내 젊은 음악인들이 갈 곳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나마 밴드에서 보컬리스트로 활약했던 뮤지션들은 솔로 가수로 독립하여 트로트 성분 가득한 소위 ‘록뽕’, 혹은 ‘트로트 고고’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장르 아래로 몸을 낮추는 대가로 ‘10대 가수’ 진입이라는 면죄부를 하사 받을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 밴드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파트에만 충실하던 연주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딴 나라 이야기’였다. 음악인으로서 모든 희망이 거세당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음악을 포기하고 해외로 떠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거나, 나이트클럽에서 취객들의 비유를 맞추는 음악을 연주하며 ‘배운 도둑질’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TV는 영화 ‘고고 70’에서 나온 표현처럼 “배불뚝이 중견만 나오는 경로당 잔치”로 전락했다. 대학가요제는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1977년 9월 3일,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MBC 대학가요제 본선에서 서울대학교 캠퍼스 밴드 샌드 페블즈의 ‘나 어떡해’를 비롯 이명우의 ‘가시리’, 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 또 박선희의 ‘하늘’과 같이 기존에 들을 수 있던 음악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새로운 음악들이 좁은 캠퍼스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무대는 TV를 통해 전국으로 중계되어 순식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대학가요제를 모델로 한 ‘강변 축제’, ‘해변 가요제’와 그 후신인 ‘젊은이의 가요제’, ‘대학가요 축제’ 등 유사한 많은 캠퍼스 페스티벌들이 각 방송국에서 앞 다퉈 개최되었고, 가요제출신 가수들은 ‘10대 가수’로 등극했으며, 음반사들은 이러한 예비 가수들을 잡기위해 가요제 개최 이전부터 물밑 작업을 하기도 했다.
대학가요제가 그 시작과 함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이유는 초기 대학가요제의 취지였던 명랑한 대학풍토 조성과 건전가요 발굴이라는 사전적 의미보다 출전한 참가자들의 ‘건강’하고 ‘신선’한 음악성에 있었다. 실제로 1980년 주간경향에 실렸던 ‘제4회 MBC 대학가요제 모집 요강’을 보면 대학가요제의의 모토가 “새 시대 호흡, 참신한 젊음의 대향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소위 ‘대마초파동’ 이전 일반 무대에서 들을 수 있던 록 음악의 강렬함과 포크 음악의 진지함이 수면위로 부상했지만, 이들의 록과 포크는 신중현, 김민기는 물론 비틀스(The Beatles), 밥 딜런(Bob Dylan)의 그것과도 완전히 다른 별종 즉 새로운 젊음의 음악이었다. 이번에 재발매되는 초기 대학가요제, 즉 1회와 2회에 해당하는 77년과 78년 대학가요제 수록곡들은 그러한 대학가요제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잠시, 이번 음반에 수록된 곡 가운데 대표곡들을 살펴보자.
‘가시리’는 충남대학교 이명우가 1회 77회 대학가요제에서 불러 은상을 차지한 곡이로, 고려 가요에 이스라엘 곡 ‘Erev Shel Shoshanim’의 멜로디를 붙였다. ‘Erev Shel Shoshanim’은 이스라엘 구전곡으로, 유태인들의 결혼식장에서 울려 퍼지던 곡이다. 첫 녹음은 1957년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나 나나 무스쿠리(Nana Mouskouri)의 버전이 유명하다. 이미 이규대와 조연구의 버블껌이 1970년대 초반 같은 제목으로 발표한 적이 있지만, 이명우의 열창은 앞선 모든 버전들을 뛰어넘을 정도의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또 국문과라는 이명우의 꼬리표 역시도 ‘가시리’의 노랫말과 함께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었다. 최현군의 ‘백팔번뇌’는 78년 대학가요제 본선 진출곡이다. 77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던 이명우의 뒤를 이어 충청지역 예선에는 어쿠스틱 기타 + 가창력이라는 공식 아닌 공식을 만들었던 곡. 본상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심수봉과의 스플릿 음반 이후 다시 독집으로 이어질 만큼 주목 받았던 뮤지션이다.
‘나 어떡해’는 서울대학교 농대 샌드 페블스(Sand Pebbles)가 불러 대상을 차지한 곡이다. 샌드 페블스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캠퍼스 밴드로 1970년 창단되었고, 이수만(2기 보컬), 김창훈(5기 베이스)을 배출한 바 있다. 참가곡은 5기 멤버였으며 산울림의 베이스를 맡고 있던 김창훈이 작곡한 ‘나 어떡해’. 샌드 페블스가 대상을 받음으로 해서,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던 캠퍼스 그룹이라는 존재가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고 이후 이어지는 행사들에서 여타 캠퍼스 밴드들의 참여를 부추기며 캠퍼스 밴드들의 브라운관 점령에 있어 선봉이 되었다.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샌드 페블스는 밴드의 이름을 다음 기수에게 물려준 후 1979년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독집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드러머 김영국은 이후 박동율, 유지연 그리고 산울림의 김창완과 함께 고장난 우주선이라는 밴드에서 활동한 바 있다. 항공대 캠퍼스 밴드 활주로의 ‘탈춤’은 78년 대학가요제 은상 수상곡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배철수가 드럼을 맡았던 밴드로, 같은 해 해변가요제에서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로 인기상을 받았다. 시원스런 기타 리프와 툭툭 내 뱉는 것 같은 배철수의 창법이 어우러진 대학가요제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
민경식, 정연택, 민병호의 ‘젊은 연인들’은 1977년 대학가요제에서 동상을 받은 곡이다. 이후에는 이들 세 명의 이름 대신 ‘서울대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다. C-Em-Am-Dm-G7으로 이루어진 기타의 기본 코드와 ‘건전’한 가사는 어쿠스틱에 입문하려는 이들에게도 필수 코스와 같은 곡으로, 에어플레이 이상으로 많이 불린 곡이다. 1979년 발매된 이정선, 이광조, 엄인호로 이루어진 트리오 풍선의 유일한 음반에 리메이크로 수록되었다. 78년 대학가요제 대상곡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는 7인조 대 편성의 부산대학교 중창팀 썰물의 곡이다. 바이올린, 어쿠스틱 기타 그리고 보컬의 하모니로 구성된 이색 편성으로, 기존 가요에서 들을 수 없었던 독창적이고 신선한 진행과 구성은 대학가요제가 아니었으면 듣기 어려웠을 커다란 수확이었다.
‘젊은 태양’은 박광주, 최혜경 혼성 듀엣의 곡으로, 78년 2회 대학가요제 본선 출전곡이다. 박광주가 작사, 작곡한 이 곡은 최혜경의 무뚝뚝한 창법으로 주목을 받는 데는 성공했지만, 실질적으로 히트하게 된 것은 심수봉이 1979년에 발매한 최현군과의 스플릿 앨범에 수록하면서다. 때문에 이 음반에 수록된 원곡은 우리가 익히 들었던 심수봉의 버전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역시 1978년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했던 곡이다. 가요제 출전 당시 대학가요제의 취지에 맞지 않는 기성 가요 스타일이라서 본상은 못했던 곡. 당시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길옥윤은 자신은 최고 점수를 줬는데도 불구하고 본상을 수상하지 못해 아쉬웠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 대학가요제가 끝난 뒤에는 그 어떤 본상 수상곡 보다도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음반에 기록된 심민경은 심수봉의 본명이다. 노사연의 ‘돌고 돌아가는 길’은 78년 대학가요제에서 금상을 차지한 곡이다. 77년 대학가요제에서 박선희의 ‘하늘’이 금상을 차지한 데 이어 78년 대학가요제에서도 여성 솔로가 금상을 차지함으로 인해, 여성 솔로가 대학가요제 금상의 조건 가운데 하나라는 근거 없는 소문을 만들기도 했다. 압도적인 가창력과 국악에서 차용한 전통의 멜로디라인으로 주목받았고, 노사연은 이후 ‘우리에겐’과 ‘만남’같은 히트곡을 남기며 가수, 개그우먼, MC 등 만능 엔터테이너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송골매, 김학래, 김수철, 조하문, 이명훈, 노사연, 심수봉에서 이선희, 신해철, 이상은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 후반까지 가요제를 통해 배출된 많은 스타 가수들은 가요제의 성격을 바꿔 놓았다. 대학가요제에 출전하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학내 행사의 재주꾼이 아니라 가수가 되기 위한 가수 지망생들로 바뀌며 창작곡에 대한 신선도가 떨어졌다. 또 이러한 가요제를 통해 데뷔하는 가수들보다 오히려 더 어린 뮤지션이 기존 가요계에 등장하며 ‘젊음’이란 단어는 이미 대학가요제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도 매년 개최되고 있는 대학가요제지만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가요제의 시작이 젊은 지성인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관제행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작이 어찌 되었건 간에 이러한 가요제들이 주로 학내 행사로서 기능했던 캠퍼스 가요와 대학가의 재간꾼들을 대중문화의 한 트렌드이자 아이콘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듯 새로운 음악의 주인공들은 1975년 이후 젊은이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예전 청년문화의 기억을 되살리게 해 주었으며, 당시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까지의 어린 학생들에게도 “나도 대학에 가면 가요제에 꼭 출전하리라”는 소박한 꿈을 심어주었다. 또 그런 순수하고 풋풋한 이야기들을 담은 영화들이 이전 ‘얄개’로 대변되던 하이틴 영화의 무대를 캠퍼스로 옮기며 그 맥을 이어주었고, ‘영 11’이나 ‘젊음의 행진’과 같이 스스로가 주체가 된 신생 쇼 프로그램의 큐시트를 화려하게 만들었다. 단지 음악이라는 하나의 분야를 벗어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냈던 것이다. 대학가요제는 이렇게 우리 대중음악의 암흑기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전환점으로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우뚝 섰던 행사이자 현상이었다. (20151027)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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