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를 이끌어 가는 주된 테마는 바로 ‘Best 5’다. 물론 영화는 전체적으로 주인공으로 나오는 존 큐잭이 멀어졌던 자신의 애인과 다시 친해지기까지의 이야기지만, 그 외에도 그는 생활의 모든 것은 ‘Best 5’와 연관지어 생각한다. 또 배경으로 나오는 중고 음반샵과 함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은 바로 자신의 ‘Best 5’를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하는 주인공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요즈음은 친한 친구에게 음악선물을 할 때 인터넷 접속을 해서 휴대전화를 통해 보내거나, mp3 파일을 직접 이메일로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한때 카세트 테이프 대신 CD에 자신의 베스트 음악을 담아 선물해 주기도 했지만, 이제 그것도 ‘예전의 풍습’이 되어버린 듯 하다.
이렇게 녹음 테이프를 누군가에게 선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렇겠지만, 카세트 ‘공테이프’를 살 때는 꼭 박스 단위로 사게 된다. 그리곤 테이프를 받고 좋아한 어떤 사람을 생각하며 녹음을 시작한다. 머릿속에 떠올렸던 수많은 멋진 곡들의 음반을 한 장씩 꺼내들고, 먼지가 없도록 깨끗하게 닦아, 턴테이블의 바늘을 올려두고 떨리는 마음으로 녹음 버튼을 누르고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다. 시작하기 전 조금이라도 먼지소리가 들어가거나, 미처 곡의 시작에 맞춰 버튼을 누르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전곡부터 녹음을 다시 하거나, 아예 새 테이프를 꺼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경우도 있다. 하지만 A면의 녹음이 끝날 무렵, 다시 한번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남은 곡의 길이와 남은 테이프의 분량이 좀처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미리 라이브 음반을 선택해서 시작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으로 절묘하게 시간을 맞추기도 하고, 심각한 경우는 테이프를 분해하여 남은 만큼을 잘라내고 다시 조립하기도 한다. 이제 남은 B면. 처음에는 그럭저럭 녹음을 하지만, 끝으로 갈수록 어떤 곡을 추가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이런 곡을 넣으려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전혀 맞지 않는 것 같고, 다른 곡을 넣자니 왠지 좀 ‘싸구려’느낌이 들기도 하고... 결국 끝을 채우지 못한 카세트 테이프들은 개봉된 지 하루만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지우고 다시 녹음하면 되겠지만 아무래도 새로 녹음하는 데는 새 카세트 테이프가 나을 것 같은 기분에 좀처럼 그렇게 하지 않아, 지금도 테이프 꽂이에는 끝을 채우지 못한 미완의 테이프들이 수북하다.
누군가에게 건낼 테이프의 경우 이렇게 정성을 쏟지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녹음할 때는 재활용 테이프를 쓰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들어보지 못한 곡을 녹음하는 것이니 그만큼 ‘위험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음악을 통해 만난 친구들 중에 ‘한샘 국어’, ‘성문 종합 영어’나 영어회화 테이프를 애용했다는 이야기에, 동질감이 들어 한참을 웃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래디오 녹음의 경우에도 진행자의 멘트가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버튼에 손을 올리고 숨죽이거나 아예 더블 데크 카세트를 가지고 다시 위에서 이야기한 선물용 테이프를 녹음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테이프에 다시 녹음을 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테이프에는 정성스럽게 나름대로의 이름을 정하고 순서를 메겨가며 정리를 하게 된다. 곡이 나가고 있는 사이에 멘트를 집어넣는 ‘몰상식’한 DJ들은 ‘왕재수’로 몰려 청취자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
요즘 출연하고 있는 한 방송의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를 통해 안 사실이지만, 방송을 위한 선곡을 할 때 CD를 찾아 듣지 않는다고 한다. 선곡은 중앙의 한 서버에 들어있는 곡들 가운데서 하게 되는데, 그 서버에는 소위 ‘히트곡’위주로 입력이 되기 때문에 한 음반에서 두세곡 밖에는 라디오를 통해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진행자나 음악 담당 프로듀서들이 자신의 음반을 가져오지 않는 이상 특정한 곡들 이외에 다른 음악을 듣는 것은 힘든 일이 되어버렸고, 음반사나 밴드들이 홍보를 위해 들고 간 음반들은 책상 옆에 그대로 쌓여 있다가 폐기처분되곤 한다.
군에서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과기대의 음악 동아리인 ‘언더 매니아’에서 주최하는 음악 감상회에 참석할 일이 있었다. 주로 프로그레시브락을 다루던 동아리의 성격을 반영한 선곡은 일반인이 듣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부분들이 있었나보다. 옆에 앉아있던 한 모르는 여자 관객이 음악이 소개되는 중간중간 음악에 관련된 여러 가지를 계속해서 물어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한 공기업의 연수를 위해 대전에 왔고, 연수가 끝난 이후 열차시간까지 남는 시간을 이용해 포스터를 통해 알게된 음악 감상회를 찾은 것이다. 그 날 감상한 곡들을 꼭 테이프에 녹음해달라는 부탁에,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왼손으로 또박또박 적은 영선이라는 이름과 경북 예천이라는 다소 생소한 주소를 받아 적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정성스레 녹음한 보냈다. 이후 도착한 답장에서는 테이프에 수록된 곡들에 대한 자신의 꼼꼼한 감상평을 볼 수 있었다. 이런 편지들이 몇 차례 오가면서 그녀는 자신이 좋아한다며 보내준 르네상스 세속음악을 담은 테이프를 보내기도 했다. 사실 지난 호에 특집기사로 실었던 중세음악 가운데에서 세속음악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도 바로 그때부터다.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자신의 학교가 배경으로 나온다는 이야기에 소설책을 사서 읽으며 사촌형이 나왔던 경북대학교를 떠올렸고, 난 내가 속한 대학 음악 동아리의 회지를 테이프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생일날 생각지도 못했던 소포 한 개를 받았다. 소포에는 손으로 떠서 만든 두툼한 목도리가 하나 들어있었다. 함께 동봉한 편지에는 “정성스럽게 카세트 테이프를 녹음하는 마음과 한 땀 한 땀 떠가는 손뜨개는 많은 부분이 닮아있는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가 쓰여있었다. 아마도 테이프나 목도리가 완성될 때까지 줄곧 선물을 받을 한 사람을 생각한다는 공통점을 이야기한 듯 하다. 선물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학생활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그냥 보내는 게 아쉬워서, 행선지 없이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하게도 어디 어디를 몇 일에 걸쳐서 다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이 경북 예천이었다는 사실만이 또렷하다. 무궁화를 타고 구미에서 내려, 비둘기호로 갈아타고 얼마만큼을 더 갔던 것 같다.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도착한 예천. 드라마에서나 본 것 같은 시골의 간이역 대합실. 큼지막한 무쇠 난로 위에 올려진 주전자는 예전 증기기관차처럼 연신 하얀색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미리 연락하지 않은 갑작스런 방문이었지만, 그동안 편지를 통해 주고받았던 자신의 베스트 곡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서먹할 수밖에 없었던 둘의 사이를 풀어주었다. 밤이 가는 줄 모르고 하던 이야기 중에 먹던 치즈를 잘라 에이스 크래커 위에 얹어서 먹었던 기억은 지금도 내가 과자를 먹는 습관으로 굳어졌고, 그때 받아온 빌 더글라스 CD는 신비로운 켈트 음악과 뉴에이지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음악을 어느 정도 듣는지가 컴퓨터 파일의 ‘기가’단위로 따지는 것이 보편화된 지금. 얼마 전 나에게도 우연히 mp3플레이어 한 개가 생겼다. 지난 기자수첩 지면을 통해 ‘호주머니의 동반자’라고 이야기한 것과 같이 출퇴근 시간이 긴 나로서는 너무나 유용한 ‘물건’이다. 하지만, 한번도 512메가라는 플레이어가 가진 용량을 채워본 적이 없다. 예전 테이프 한 개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던 그때처럼 언제나 모든 곡을 지웠다가 다시 채워 넣곤 하지만, 채 10곡을 넘기기가 힘들다. 물론, 달라진 점은 있다. 예전 녹음 버튼에 손을 올려놓고 가슴 졸이던 마음이 없어지고, 기계와도 같이 마우스를 몇 번 움직이면 된다는 것이다. mp3플레이어 이후 또 어떤 장치가 새로 만들어질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도 위에서 이야기한 그런 애틋한 추억들이 있을까. 지금 와서 20년 전 미처 채우지 못한 테이프를 다시 꺼내 들어도 생생하게 기억해 낼 수 있는 그때의 모습과 생각 같은 것들 말이다. 집에 돌아가면 우선 고장난 카세트 데크부터 고치고 구석에 아무 이름도 쓰여있지 않은 카세트 테이프들의 먼지들을 떨어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한번 해 봐야겠다.
(월간 핫뮤직 200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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