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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MUSIC LIFE/LINER NOTES (DOMESTIC)

조용필의 실질적 데뷔앨범 / ‘단절’이 아니라 ‘과정’이며 ‘발전’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조용필의 실질적인 데뷔앨범이다. ‘실질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이 음반 이전에 스플릿 음반이 한 장 더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롯이 조용필의 곡만 수록된 음반은 이 음반이 처음이다. 이 음반이 나올 무렵 알려져 있다시피 조용필은 애트킨스(Atkins), 파이브 핑거스(Five Fingers)를 거쳐 김대환의 김트리오에서 활동했다. 김트리오의 음반과 조용필의 음반이 각각 따로 발매되며, 조용필의 솔로 음반은 김트리오의 연주가 아니라 세션 연주인들의 반주로 녹음됐다. 계속해서 밴드 활동을 했던 그의 기록이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가수’라는 부분에 방점을 찍는 음반을 제작하려 했다는 점은 분명하고 그 의도처럼 조용필이 홀로 설 수 있는 확실한 계기가 됐다.


‘일하지 않으면 사랑도 않을래’의 원곡은 아드리아노 첼렌따노(Adriano Celentano)와 끌라우디아 모리(Claudia Mori)가 각각 불러 1970년 산레모 페스티벌(Sanremo Festival)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Chi Non Lavora Non Fa L'amore’다. 원곡이 초기 산레모 페스티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스케일 큰 오케스트레이션을 배경으로 솔리스트와 중창단이 노래를 주고받는 소위 ‘콜 앤 리스펀스(call and response)’ 형식인데 반해, 이 음반에 수록된 버전은 어쿠스틱 기타와 베이스 기타 그리고 손뼉만으로 이뤄진 단순한 연주와 듀엣의 포맷으로 편곡됐다. 확실하진 않지만, 조용필의 상대 보컬 역시도 그가 가성으로 부르는 듯 들리는데, 만일 그렇다면 이후 그의 재기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던 ‘단발머리’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제공한다.


‘사랑의 자장가’는 스코틀랜드 민요 ‘Geordie’를 번안한 곡으로, 우리에겐 존 바에즈(Joan Baez)의 음성으로 잘 알려진 곡이다. 존 바에즈 외에도 샌디 데니(Sandy Denny), 트리스(Trees) 등 영국 포크 애호가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받는 곡. 하지만 조용필의 버전에서는 이러한 원곡의 포크성향보다는 이 음반의 전체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소울의 영향력과 197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창법과 연관 지을 수 있는 트로트의 원형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스트링 위주로 편곡된 반주는 어쿠스틱 기타를 제외한다면 대체적으로 포크보다 발라드에 가까운데, 전반적으로 검은색 느낌의 노래는 어쩌면 비슷한 시기 발매된 김대환과 김트리오 악단의 유일한 앨범 [드럼! 드럼 ! 드럼! 앰프키타 고고! 고고!](1972)와 더 큰 연관을 지을 수 있다. 오히려 색소폰이 연주하는 멜로디는 물론 쉴 새 없이 흐느적거리는 그루브를 만들어내는 베이스와 드럼연주로 이루어진 김트리오의 연주가 조용필의 노래와 어우러지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이러한 아쉬움은 음반의 머릿곡으로 자리하고 있는 ‘꿈을 꾸리’ 역시 마찬가지다. 


‘꿈을 꾸리’는 소위 ‘김대환 사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이들(Idol)의 유일한 음반 [아이들과 함께 춤을](1971)에도 수록된 바 있는데, 풋풋한 느낌의 아이들 버전과 달리 김트리오의 연주 버전은 말 그대로 ‘프로페셔널 밴드’의 매력이 그대로 묻어나는 연주로 담겼다. 이에 비해 조용필의 버전은 ‘솔로 가수’라는 점을 의식한 탓인지 전형적인 ‘XXX 레코드 전속 악단’ 스타일의 평이한 연주와 잔잔한 코러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조용필은 특유의 소울풀한 창법으로 원곡의 또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사랑의 자장가’와 마찬가지로 그가 활동했던 김트리오의 연주와 어우러진 ‘완전체’의 모습으로 녹음되었으면 “그저 노래 잘 하는 가수 조용필의 초기 대표곡”이 아니라, 국내 밴드 음악의 또 다른 흐름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까. 초기 국내 록음악의 계보를 양분했던 신중현과 김홍탁의 접근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고, 그렇다고 흑인음악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데블스(Devils)의 그것과도 확연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또 다른 접근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미 지난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불필요한 것. 어쨌거나 평범한 가요에 진득한 소울을 입힌 조용필의 능력은 분명 주목할 부분이다.


계속해서 언급하게 되는 조용필의 소울 음악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된 것은 아마도 ‘님이여’, 즉 바비 블랜드(Bobby Bland)의 ‘Lead Me On’이 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조용필은 파이브 핑거스 활동 이후 잠시 광주에서 밴드 활동을 한 적이 있다. 마침 기타리스트가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하우스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게 됐다. 당시 한 병사가 자신의 생일이 다음날인데 바비 블랜드의 음반을 주며 타국에서 맞는 쓸쓸한 생일을 위해 ‘Lead Me On’을 연주해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본 게 조용필이 이 곡을 부르게 된 계기다. 조용필은 이후 인터뷰에서 노래를 들으며 눈물 흘리던 병사를 보며, 자신의 노래가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했으며, 그런 노래가 우리에게 정서적으로도 맞고 좋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어쨌거나 이 곡은 광주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김트리오 활동 후 솔로 활동을 시작할 때 조용필의 대표곡이 되었고, 이 노래에서 들을 수 있는 원곡에 버금가는 진한 소울은 초기 그의 창법에 있어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초기 소울풀한 조용필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외에 이 음반의 매력은 또 있다. 바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원형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소위 ‘트로트 고고’의 유행과 함께 다시 녹음되어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된 이 곡의 원형은 의외로 단촐한 어쿠스틱 기타와 베이스, 그리고 조용필의 목소리로만 구성되었다. 록 밴드에서 활동하던 조용필이 어쩌면 처음으로 도전했던 본격 트로트 넘버다. 트로트 넘버의 연주가 어쿠스틱 기타로만 이루어진 점이 독특하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 초기 국내 트로트 곡들 가운데 많은 곡들이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녹음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렇게 이상한 부분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가사와 살짝 차이가 있는 부분은 이 곡을 다시 취입하자고 제안한 킹 레코드의 대표 박성배(킹박)의 권유에 의해서다. 킹박은 대표적인 국내 히트 메이커다. 당시 재일동포 고향 방문단이 부산항에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원곡의 ‘님’이란 단어 대신 ‘형제’를 넣어 다시 취입한 것이다. 그의 선구안은 적중했고, 부산의 유흥가에서 시작한 인기는 거꾸로 서울로 올라가 순식간에 조용필을 스타로 등극시켰다. 다시 녹음된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같은 풍성하고 세련된 느낌은 아니지만, 소박한 편곡이 오히려 정겨운 녹음이다.


이 외에도 송창식이나 윤형주의 버전으로 익숙한 나나 무스쿠리(Nana Mouskouri)의 ‘Over & Over’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작은집’, 현인의 히트곡이지만 박인희의 목소리로 잘 알려진 ‘세월은 가도’(박인희 곡의 제목은 ‘세월이 가면’) 등 국내 초창기 포크 넘버들도 같은 음반에 수록되었는데,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곡들과 그 느낌은 많이 다르다. 조용필의 실질적인 데뷔앨범에 해당하는 음반이지만, 그는 이미 다른 성격의 곡들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이후 발표되는 음반들에서 더욱 넓게 펼쳐지게 된다. ‘신민요’에 대한 관심으로 불렀던 ‘한오백년’, 기존 가요를 다시 부른 ‘대전 블루스’ 등 원곡이 조용필로 생각되게 만드는 곡들이 탄생하는 것을 조용필이라는 ‘가수’의 처음 시작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큰 의미가 있다.


물론 전체적으로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았고, 어쩌면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발표된 음반으로 들릴 수는 있다. 하지만 향후 국민가수로 등극할 조용필 음악의 시작을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시작과 실질적으로 그가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명곡들을 쏟아내던 무렵의 음악들이 ‘단절’이 아니라 ‘과정’이며 ‘발전’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기에도 좋은 음반이다. (20150119)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