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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MUSIC LIFE/LINER NOTES (OVERSEAS)

THE AGONIST [Once Only Imagined]

우먼 프론티드 메틀코어 밴드의 새로운 가능성
THE AGONIST [Once Only Imag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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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인 디스 모먼트(In This Moment)의 이야기를 하면서 밴드 내에 여성 보컬리스트가 있는 사실만으로도 한가지의 이야깃거리를 더 제공할 수 있는 셈이니 그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50년을 훌쩍 넘긴 락의 역사 가운데서 파워풀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 락커가 차지하는 위치는 사실 극히 미약하다.

혹자들은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을 필두로, 그레이스 슬릭(Grace Slick), 앤 윌슨(Ann Wilson), 팻 베나타(Pat Benatar) 등의 이름을 거론하며 반박할지 모른다. 물론 그들이 뛰어난 뮤지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눈에 띄게 비범한 뮤지션이 그나마 미약한 여성 락커의 위치를 대부분 차지한다. 바꿔 말하자면 승리자들만을 기억하는 역사와도 같이 눈에 띄게 비범한 뮤지션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여성 락커들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그 실력보다 외모를 중요시하는 사회적 풍토에서 음악계, 아니 락계라고 해서 그 상황이 달라질 리는 만무하다. 하물며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라우드뮤직 계열에서 볼 때 그러한 이야기는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체스테인(Chastain)의 레더 리온(Leather Leone), 도로(Doro) 등 비교적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보컬리스트에서 홀리 모세스(Holy Moses)의 사비네 클라센(Sabine Classen), 아치 에너미(Arch Enemy)의 안젤라 고소(Angela Gosow), 또 얼마 전 데뷔앨범을 발표한 인 디스 모먼트의 마리아 브링크(Maria Brink) 등 몇몇 보컬리스트를 제외한다면 다른 이름들이 쉽사리 떠오르질 않는다. 그나마 시너지(Sinergy)의 킴벌리 고쓰(Kimberly Goss) 정도가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까. 시대가 변해 락 보컬리스트라면 무엇보다도 그 실력이 우선이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마음 한 구석에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외모까지 따라 준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냐는 생각이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이번에 센추리 미디어와 전격 계약하여 데뷔앨범을 발매하는 몬트리올 출신 밴드 애거니스트(The Agonist)의 보컬리스트 앨리사 화이트글루즈(Alissa White-Gluz)를 주목하자.

2006년, 캐나다판 ‘아메리칸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는 ‘캐나디안 아이돌’에 참가할 당시 현재의 모습과 같은 파란색 머리에 망사 스타킹을 신고 ‘Bohemian Rhapsody’를 부르며 타고난 끼를 발산했던 보컬리스트. 캐나디안 아이돌은 이러한 그녀에게 ‘보헤미안 랩소다이저’라는 예명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미 2003년 할로우 레인(Hollow Reign)이라는 밴드를 통해 자신의 고장 몬트리올을 중심으로 한 로컬씬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2004년 중반에는 템페스트(The Tempest)로 이적하여 활동했다. 애거니스트는 센추리 미디어와 계약하기 직전, 약간의 멤버교체와 함께 템페스트에서 개명된 이름이다. 애거니스트의 특징은 메틀코어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틱한 구성을 가지고 있고, 강약완급이 적절하게 안배되어있으며, 멜로디를 중시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밴드의 사운드가 만들어질 수 있는 요인 가운데 첫 번째가 바로 앨리사의 목소리다. 그녀의 목소리는 멜로디어스한 클린보컬 부분에서는 에반에센스(Evanescence)의 에이미 리(Amy Lee)를 연상시키는 반면, 과격한 그로울링과 스크리밍을 쏟아놓을 때는 밴드 내에 두 명의 보컬리스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를 확인할 정도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러한 두 가지 스타일의 병차와 교차 진행,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라인을 가진 클린보컬로 정화되는 구성은 청자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예테보리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멜로딕 데쓰메틀 밴드들의 영향력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는 기타 사운드, 무자비한 융단폭격과도 같은 드럼연주 등 한계를 두지 않는 그 표현 영역은 단지 메틀코어라는 한가지 장르로 자신들을 귀속시키기를 거부하며, 데뷔앨범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오래도록 인디씬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다소 거칠었을법한 사운드는 크립탑시(Cryptopsy)의 기타리스트 크리스 도날드슨(Christian Donaldson)의 프로듀스와 언어쓰(Unearth), 마스토돈(Mastodon), 나일(Nile) 등의 음반을 마스터링했던 웨스트 웨스트 사이드 뮤직(West West Side Music)의 치프 엔지니어 앨런 더치스(Alan Douches)의 손을 거쳐 세련되게 음반으로 옮겨졌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30초 가량의 오프닝 ‘Synopsis’에 이어지는 ‘Rise And Fall’은 살아서 꿈틀거리는 그루브에 덧입혀지는 스크리밍과 클린보컬이 곡의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쥐락 펴락 청자들을 몰입시킨다. ‘Bord Dead; Buried Alive’는 베이스를 담당한 크리스 켈스(Chris Kells)의 사악한 그로울링이 마치 앨리사의 목소리와 대화를 주고받듯 겹쳐지는 곡. 단발의 비명으로 시작하는 ‘Trophy Kill’의 복잡한 박자 전개도 귀기울일 만 하다. ‘Take a Bow’와 첫 번째 싱글로 커트되어 이미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Business Suits And Combats Boots’에서 들을 수 있는 중동풍의 멜로디라인도 흥미롭다. 특히 ‘Business Suits And Combats Boots’는 메틀코어를 비롯, 멜로딕 데쓰메틀, 혹은 정통 파워메틀에서 우먼 프론티드 고딕메틀 등 여러 선배들이 발표한 음악들의 장점만을 취합한 듯한 나열이 돋보이는 베스트트랙 가운데 하나다. 크리스 켈스와 프로듀스를 맡은 크리스 도날드슨도 백업보컬로 참여했지만 그다지 존재감은 크지 않다.

사실 음반을 모두 듣고 나면 앞서 이야기했던 부분들이 반드시 밴드의 장점만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저 에반에센스풍 멜로디와 보컬에 부분적으로 데쓰메틀적 요소가 합쳐졌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30분이 조금 넘는 총 러닝타임이 불만인 사람 역시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역으로 생각하면 서로 다른 영역의 매니아들을 하나의 주제로 융화시킬 수 있는 폭넓은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며, 이 음반이 데뷔앨범인 점을 상기할 때 보다 단련되고 숙성된 차기작에 대한 밝은 희망의 근거가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앞서 열거했던 비범한 여성 뮤지션들의 이름과 함께 떠올릴만한 또 한 명의 걸출한 여성 보컬리스트가 탄생했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하자. (2007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