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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MUSIC LIFE/LINER NOTES (DOMESTIC)

서울 나그네, 국내 락의 암흑기에 발표된 초인적인 연주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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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척박한 이 땅의 락필드에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며 국내 락의 황금기를 구가했던, 의욕과 패기에 넘친 젊은 뮤지션들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긴급조치 9호’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외부 압력에 의해 날개가 꺾이고 혀가 뽑히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두운 침묵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나마 밴드에서 보컬리스트로 활약했던 뮤지션들은 솔로 가수로 독립하여 트로트 성분 가득한 소위 ‘록뽕’, 혹은 ‘트로트 고고’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장르 아래로 몸을 낮추는 대가로 ‘10대 가수’진입이라는 면죄부를 하사 받을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 밴드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파트에만 충실하던 연주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딴 나라 이야기’였다. 음악인으로서 모든 희망이 거세당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음악을 포기하고 해외로 떠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거나, 나이트클럽에서 취객들의 비유를 맞추는 음악을 연주하며 ‘배운 도둑질’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웠던 시기를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던 밴드가 있다. 1978년에 ‘한동안 뜸했었지’라는 이색작으로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사랑과 평화가 바로 그들이다.

사랑과 평화가 보여줬던 전례 없는 강력한 펑키 사운드는 당시 음악의 한 장르로서가 아니라 춤의 일종으로 수입되었던 ‘디스코’가 몰고 온 세찬 기류에 편승하며, 가창이 아니라 연주위주의 음악을 선보이면서도 충분히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1970년대 초반 이후 처음으로 증명해 보였고, 그 파장은 오히려 앞서 국내 락의 황금기라고 이야기했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를 가뿐히 넘어설 정도로 대단했다. 실제로 이들의 최고작으로 손꼽히는 1집과 2집 음반은 따로 메인 보컬을 두지 않고, 연주곡과 보컬 수록곡의 비중이 비교적 균등하게 배정되어있다는 점 등 동시대 여타 밴드들과 비교한다면 분명 기형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사랑과 평화는 이 두 장의 음반으로 음악성과 대중성이라는 성과를 모두 낚아챘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의 토대가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랑과 평화라는 밴드 이름으로 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쌓아왔던 멤버 개개인의 탄탄한 실력이다.

서울 나그네는 핫락스(Hot Rock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사랑과 평화의 전신 밴드다. 아니 어쩌면 전신 밴드라는 표현보다 그냥 ‘개명’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지도 모른다. 이미 10대 때 ‘신동’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아이들(Idol)이라는 밴드를 이끌었던 기타리스트 최이철은 이후 김대환의 김트리오, 영 에이스를 거치며 서울 나그네라는 밴드를 조직한다. 서울 나그네의 멤버는 기타에 최이철, 키보드에 김명곤, 베이스에 이남이, 드럼에 김태흥 그리고 보컬과 퍼커션에 이철호. 초기 사랑과 평화의 정예 라인업과 동일하다. 이들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음반은 [고고 생음악 1집]과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이며, 두 음반 모두 1976년에 발매되었다.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은 사랑과 평화가 ‘한동안 뜸했었지’와 ‘장미’를 히트시키며 명실공이 ‘국가대표 밴드’가 된 이후인 1979년 사랑과 평화의 이름으로 재발매되기도 했다.

[고고 생음악 1집]. 색소폰이 ‘촌스럽게’ 정면으로 부각된 사진이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음반의 타이틀 등 외형적으로 어느 한 부분 구매의욕을 자극하는 부분이 없다. 게다가 수록곡을 보면 현재 소위 ‘트로트 3인방’ 가운데 한 명으로 군림하고 있는 송대관의 스매시 히트곡 ‘해뜰 날’, 나훈아의 ‘해변의 여인’, 이수미의 ‘내 곁에 있어주’와 같이 트로트를 포함한 총 5곡의 트랙들. 음반이 발매된 시점으로 본다면 최고의 ‘인기가요’였을지 모르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살펴본다면 그 수록곡 역시도 선뜻 손을 내밀기에 부담스럽다. 하지만 8분이 넘는 첫 번째 트랙 ‘해뜰 날’의 인스트루멘틀 버전에서부터 이러한 선입견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여실히 증명된다. 그다지 특출한 부분 없었던 메인 멜로디는 엇박의 공격적인 리듬 패턴을 통해 ‘트로트의 왕정복고’를 이루었던 원곡과는 전혀 다른 곡으로 거듭났다. 중반부 김명곤이 자유롭게 펼쳐 보이는 화려한 키보드의 향연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해외 밴드들의 그것에 비해 오히려 비교우위에 놓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에 넘치며, 앞서 언급했듯 시종 청자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김태흥과 이남이의 리듬파트도 단연 압권이다. 수록곡 가운데 또 하나의 베스트 트랙은 바로 B면의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는 ‘내 마음은 풍선’이다. 장미화, 김준의 음성으로 익숙한 이 곡은 ‘해뜰 날’과 달리 보컬이 가미된 곡이다. 마치 1960년대 말에 발매되었던 히 파이브의 ‘징글벨’을 듣는 듯, 메인 테마 이후 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게 편곡된 연주 그리고 다시 메인 테마로 되돌아와 마무리되는 구성은 당시 클럽에서 활동하던 밴드들의 정형화된 한 패턴이었던 듯 하다. 역시 고인이 된 김태흥의 드럼 솔로를 비롯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듯 치열하게 펼쳐지는 김명곤과 최이철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이렇듯 출중한 연주의 만찬을 맛볼 수 있는 음반에 [고고 생음악 1집]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점과 당대의 인기가요로 수놓아진 레퍼토리들에 대한 의문점을 풀어보자. 글의 도입부에 언급한 밴드들에 대해 내려진 ‘긴급조치 9호’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련의 사태에서 서울 나그네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이 대중들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은 지하의 어두운 나이트클럽이었고, 밴드의 음악을 소비하는 이들은 음악 감상을 하거나 밴드의 연주를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술 한잔을 하고 춤으로 여흥을 즐기려는 사람들이었다. 마치 나이트클럽의 입구 옆에 붙어있을 법한 카피 문구가 음반에 사용된 점이나, 무대에서 연주하던 누구나 알 수 있는 빅 히트곡들을 그대로 음반의 레퍼토리로 가져온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밴드의 입장에서 볼 때 불만투성이일 수밖에 없는 음반이었지만, 서울 나그네는 그러한 불만들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탄탄한 내공으로 훌쩍 넘어섰다. 시기적으로 볼 때 밴드에게 있어서는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물은 그 어떤 시대에 발표된 음반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 갑작스런 결과로 도출되긴 했지만, 1978년 ‘한동안 뜸했었지’의 충격은 바로 이러한 스스로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국내 락음악의 암흑기에 발표된 금싸라기와도 같은 명반이다.

글 송명하 (2010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