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NER'S MUSIC LIFE/LINER NOTES (DOMESTIC)

양병집 [The Sounds of Yang Byung Jip 1974-1993]

포크의 독보적 존재 양병집, 초기 걸작의 집대성

 

 

양병집, 그의 이름엔 언제나 ‘김민기, 한대수와 함께 국내 3대 저항가수’라는 표현이 붙는다. 하지만 그러한 표현보다 오히려 ‘넋두리’라는 한 단어가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물론 ‘넋두리’는 양병집의 데뷔앨범 타이틀이다. 그리고 음반의 발표와 함께 그의 음악을, 아니 그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넋두리’가 됐다. 그의 데뷔앨범 [넋두리](1974)는 박정희 정권 당시 금지곡 파동에 휘말려 발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량 회수되어 폐기처분됐다. 물론 그의 음반은 폐기시킬 수 있었지만 그의 음악까지 회수할 순 없었다. 그가 발표했던 음악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오히려 더욱 긴 생명을 얻었다. 그의 넋두리는 음반이 아니라 소외되고 억압받는 소시민들의 넋두리가 되어 입으로 구전됐다. 마치 그가 구전되던 노래나 해외 포크 음악에 가사를 붙였던 것처럼. 

 

‘넋두리’라는 단어를 앞세웠던 것처럼 양병집이 자신의 음악에서 가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음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넋두리’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넋두리 「명사」 

「1」 불만을 길게 늘어놓으며 하소연하는 말. ≒넋풀이「1」.

  ¶ 넋두리를 늘어놓다/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넋두리 같은 혼잣말을 했다./함안댁의 넋두리 반, 울음 반에 아낙네들도 더러 눈두덩을 찍어 누르며 돌아선다.≪김춘복, 쌈짓골≫ 

「2」 『민속』굿을 할 때에, 무당이나 가족의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의 넋을 대신하여 하는 말. ≒넋타령.

 

양병집의 데뷔앨범 타이틀 ‘넋두리’는 물론 「1」에 해당하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재킷의 사진부터 담배를 불량스럽게 꼬나문, 불만에 가득 찬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 됐다. 그리고 양병집의 이러한 불만에 찬 넋두리는 출발부터 그와 그의 노래를 ‘비주류’로 분류했고, 그러한 시선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1981년 동아일보의 기사는 그러한 시선을 증명한다.

 

...(전략)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의 사정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런대로 주류(主流)와 비주류(非主流)의 가요로 구분해볼 수도 있겠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이르는 한때 대학가를 풍미했던 김민기, 한대수, 양병집, 양희은 등이 지난 시대의 비주류들. 나훈아, 남진, 하춘화, 장미화, 이수미 등이 화려한 스테이지를 온통 휩쓸고 있었을 무렵이지만 비주류들의 노래는 나름대로 애호가들의 층을 두껍게 했다. 아침이슬, 친구,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 아하 누가 그렇게, 역(逆)과 같은 다소 시니컬한 분위기의 노래들은 당시 교육받은 젊은 세대에게 큰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그러나 노래의 어두운 면 때문에 많은 구박을 받았으며 그 흐름은 지금에 와서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후략)...

- 동아일보 1981년 4월 8일, 사랑·이별풍조 속 끈질긴 맥 ‘비주류가요’

 

양병집이 아마추어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건 1971년이다. 그리고 그의 활동은 당시에 활동하던 많은 포크 싱어들과 그 배경이 달랐다. 양병집은 성적 때문에 서울대, 연대, 고대를 포기하고 서라벌 예대에 진학했다. 진학한 다음해부터 예비고사가 실시되었는데, 시험을 보기 싫어서 그냥 서라벌 예대에 원서를 냈다고 한다. 그리곤 보결로 입학했던 이유에선지 대학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 집안에서 하는 증권회사에 근무했다. 그러다가 미국 문화센터 안의 클럽생활을 하게 되었고, 1971년 ‘양준집(양병집의 본명) 리사이틀’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렇게 아마추어로 활동하던 양병집이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하게 된 건 1972년 월간팝송에서 주최했던 ‘전국 대학생 포크 콘테스트’에 참여하면서 부터다. 그때 이주원이 1등을, 김민기와 함께 도비두라는 듀오로 활동했던 김영세의 동생 김준세가 2등, 그리고 양병집이 3위에 입상했다. 당시 양병집이 불렀던 출전곡은 ‘역(逆)’이다. 이후 대학가요제를 생각하면 알겠지만, 가요제 입상과 함께 그의 음악활동도 손쉽게 풀려나갔다.

 

데뷔앨범 제작은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어느 날 양병집이 ‘타박네’를 부르는 것을 서유석이 듣고 자신이 부를 수 있도록 부탁했다. 결국 서유석의 녹음이 먼저 레코드를 통해 발표되었다. 양병집은 이후 서유석의 부탁이 그저 무대에서 부르는 건 줄 알고 있었는데 음반을 통해 발표됐고, 또 서유석이 음악을 만든 것처럼 소개된 것에 대해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서유석이 부른 ‘타박네’를 들은 이연실이 양병집을 ‘곡 잘 쓰는 작곡가’라고 생각하고 다음 음반에 수록될 곡을 부탁하러 찾아왔다. 처음엔 거절했지만, 계속해서 찾아오는 정성을 거절할 수 없어 번안을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이연실이 당시 카페를 경영하던 양병집을 거의 매일 찾아와 오래도록 앉아있던 바람에 하루 매상의 반을 올려준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양병집은 이미 만들어뒀던 ‘잃어버린 전설’과 ‘역(逆)’을 제외하고는 1주일 만에 이연실의 음반에 수록될 모든 곡을 만들었다. 이연실의 음반이 발표되어 히트를 거두자 양병집에게도 독집 음반을 함께 하자는 의뢰가 들어왔다. 이연실의 음반을 제작했던 오리엔트 기획으로부터다. 양병집은 당시 상황에 대해 “사실 당시 오리엔트의 나현구 사장은 김민기의 음반을 제작하지 못했던 것을 못내 아쉬워했고, 나는 그 대리만족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제작된 음반이 바로 [넋두리]다.

 

[넋두리]에 수록된 곡을 보면, 피터 폴 앤 매리(Peter, Paul & Mary)나, 밥 딜런(Bob Dylan)을 비롯해서 피트 시거(Pete Seeger), 우디 거스리(Woodie Guthrie)의 곡에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 대부분이다. 당시 일반적으로는 듣기 어려운 음악이었지만, 양병집은 미도파 백화점 건너편의 미국 물건을 파는 시장에서 악보를 구해 연습해, 당시 활동하던 음악 감상실 ‘내슈빌’ 무대에서 부르기 시작했다. 내슈빌에 출연하는 가수들은 거의 외국의 한 가수를 위주로 노래를 불렀다. 예를 들어 박두호는 레너드 코언(Leonard Cohen)의 노래를 불렀고, 김광희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 전문이었다. 양병집은 유명숙 등과 중창팀을 조직해 피터 폴 앤 매리의 곡을 불렀다. 피터 폴 앤 매리의 곡은 양병집 외에도 중창을 하는 팀들은 거의 자신들의 레퍼토리로 삼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이후 그가 솔로로 독립하며 가장 처음 염두에 둔 가수는 바로 밥 딜런(Bob Dylan)이다. 그들이 레퍼토리로 삼았던 피터 폴 앤 매리의 ‘Blowin' In The Wind’ 원작자. 하지만 밥 딜런 역시도 먼저 부르고 있는 가수들이 많았다. 그래서 밥 딜런을 더 파고 들어가 그곳에서 알게 된 피트 시거와 우디 거스리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레퍼토리들이 바로 데뷔앨범의 축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넋두리]의 제작은 오리엔트 기획의 나현구 사장이 맡았고, 연주는 하우스 밴드라고 할 수 있는 동방의 빛이 담당했다. 동방의 빛은 초기 국내 포크록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밴드다. 오리엔트를 통해 제작된 이장희를 비롯해서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은 물론 현경과 영애, 원 플러스 원, 4월과 5월, 투 코리언스 등 수많은 음반의 세션을 담당했고 또 명반들을 배출해냈다. 하지만 양병집의 음반에서는 다소 겉도는 느낌이 없지 않다. 양병집은 그 이유에 대해 “서로 준비과정이 없이 음반을 녹음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아쉽게도 첫 번째 음반에서의 이러한 아쉬움은 이후 발표되는 그의 음반에서도 계속해서 머리를 내밀게 된다.  물론 이러한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넋두리]는 젊은 양병집의 날 선 가사가 빛을 발하는 걸작임에 분명하다. 우디 거쓰리의 곡을 번안한 ‘서울하늘’은 당시 세태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미 이연실이 자신의 음반에 먼저 수록했던 ‘역(逆)’의 언어유희는 왜 그의 이름이 김민기, 한대수와 함께 소위 3대 저항가수 가운데 한 명에 올라 있는지 증명하기 충분하다. 이 외에도 음반에는 양병집의 대표곡 ‘타복네’, 역시 이연실의 대표곡이 된 ‘소낙비’와 최초의 자작곡 넘버 ‘아가에게’ 등 총 10곡이 수록됐다. ‘타복네’는 이북이 고향인 양병집의 어머니가 양병집이 어린 시절 효자가 되라고 불러줬던 구전곡 이었는데, 바로 이어 등장하는 자작곡 넘버 ‘아가에게’에서 그 분위기가 재현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그녀’는 1980년대 초반 MBC-TV 프로그램 ‘영 11’을 통해 다시 주목받은 곡이다. 당시 임장욱이 ‘긴 노래’라는 타이틀의 코믹송으로 개사하여 부른 버전이 인기를 모아 이후 [임장욱의 긴 노래](1981)라는 음반이 발표되기도 했다.

 

데뷔앨범을 살펴볼 때 특유의 반어법 사용과 직접적인 표현은 독특한 양병집의 음악세계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양병집은 이에 대해 “밥 딜런의 노래 가사도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Blowin' In The Wind’와 같은 곡들만 제외한다면 직설적인 곡들이 많다. 가사에 있어서 직접적인 표현은 그에게 영향 받은 부분이다. 가장 부드럽게 만들려고 했던 곡이 ‘잃어버린 전설’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곡같이 만들어주길 원했지만, 마음먹은 것처럼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남긴 바 있다. 물론 이렇게 데뷔앨범에서 결정지어진 그의 내적이나 외적 이미지가 그의 이후 활동을 옭아매는 올무가 되었음도 부인하진 않겠다. 양병집의 이후 활동이 [넋두리]만큼의 관심을 이끌지 못했다는 사실은 비단 데뷔앨범이 당한 억울한 외적 압박 때문만은 아니란 얘기다.

 

데뷔앨범 이후 양병집은 잠시 르시랑스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그의 음악활동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노래는 금지곡이 됐고 음반은 수거됐다. 양병집은 소위 ‘대마초 사범’으로 분류되어 음악활동이 금지됐고, 풀려난 이후 음악활동을 잠시 접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직업을 옮겼다. 그러던 그가 다시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는 정태춘을 만나게 되면서다. 정태춘은 원래 김민기나 양병집 둘 중 한 명을 만나러 상경했는데, 당시 김민기는 귀농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해서 양병집과 정태춘의 만남이 이뤄졌다. 정태춘의 음악을 접한 양병집은 개인적으로도 흡족해서 자신의 음반을 제작했던 오리엔트의 나현구 사장을 소개해주려고 했지만, 그의 비즈니스적인 마인드가 싫어서 산울림의 김창완을 통해 알게 된 서라벌의 이홍주 사장과 연결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침 정태춘의 입대로 그의 데뷔는 늦춰진다. 그리고 대신 이흥주 사장이 양병집에게 음반 제작 제의를 하며 두 번째 음반이 만들어졌다. 데뷔앨범이 발표되고 6년이 지난 1980년의 일이다.

 

방기남이 관여한 두 번째 음반 [아침이 올 때까지](1980)의 편곡은 강근식이 맡았고, 연주는 다시 동방의 빛이 맡았다. 기타 연주는 강근식이 직접 담당하지 않고 이승희와 이영재가 했다. 그 때문인지 기타 사운드와 연주 때문에 이질감이 느껴졌던 데뷔앨범과는 달리 무난하다. 또 번안곡 연주도 원곡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데뷔앨범의 ‘타복네’와 이 앨범 수록곡을 비교해보면 ‘무난’이라는 표현이 어떤 것인지 확실할 것이다. [넋두리]에서 자작곡 넘버가 한 곡이었던 반면 두 번째 음반에서는 아홉 곡 가운데 네 곡을 양병집이 작곡했다. 작곡에 대해 양병집은 “많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 음반까지 간헐적으로 시도했었다”며 “언제나 ‘마치 수건에서 물 짜듯’이라고 표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곡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곡을 쓰면서 느낀 점은 작곡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라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앞서 연주에 있어 무난하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이 음반은 양병집의 작곡이나 전체적인 분위기 모두 튀는 부분 없이 무난하다. 데뷔앨범의 가장 커다란 특징 가운데 하나였던 풍자적인 가사도 다소 무뎌졌다. [넋두리]의 풍자적인 대표곡들의 원곡이 피트 시거, 우디 거스리 그리고 초기 밥 딜런이었다. 반면 2집 수록곡들은 그 대상이 조금 달라졌다. 밥 딜런의 경우에도 초기 포크 스타일이 아니고 ‘One More Cup Of Coffee’가 ‘떠나지 말아요’로, 탐미적인 포크 넘버인 캣 스티븐스(Cat Stevens)의 ‘Sad Lisa’가 ‘슬픈 사랑’으로 각각 번안됐다. 그런가하면 ‘바둑’과 같은 곡에서는 2집 탄생의 단초를 제공한 정태춘의 영향이 느껴진다. 양병집은 자신이 발표했던 지난 음반들에 대한 아쉬움에 대해서 “스튜디오 들어가기 전, 먼저 얘기가 안 된 상태에서 실험적으로 한 경우 대부분이다.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조율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가수나 연주가 기량이 뛰어나면 셀프 모니터링 해서 할 수 있었겠지만”이라며 “왜 상업적으로 실패했나 생각하니, 그나마 알려진 노래는 내 키에 맞는 노래들이다. 너무 무리해서 한음이나 반음씩 올려 부른 노래가 많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는 어쩌면 그의 스타일에 가장 맞는 스타일이 바로 정태춘 스타일의 음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다시 5년이 지난 1985년, 데뷔앨범 [넋두리]의 마감이라고 할 수 있는 [넋두리 (II)]가 발매된다. 

 

[넋두리 (II)](1985)는 이 때까지 발표된 양병집의 음반 가운데 가장 록 성향이 진한 음반이다. 물론 그 스타일은 많이 달랐지만, 밥 딜런보다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Crosby, Stills, Nash & Young)과 같은 음악을 하려고 했던 양병집의 의도에 더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다. 또 처음으로 번안곡이 한 곡도 수록되지 않은 음반이다. 구전곡인 ‘타복네’를 제외하고는 모두 창작곡으로 이루어졌다. 록 성향이 진하다고는 했지만, 전반적인 연주는 어둡지 않고 밝다. 세션은 조동익과 이영재를 필두로 들국화 결성 이전, 소위 조동진 사단과 그 주변의 음반들에서 세련된 연주를 선보였던 젊은 연주 집단이 담당했다. ‘오늘 같은 날’은 윤명환이 작곡한 곡으로, 이연실이 이미 발표한 바 있다. 양병집이 작곡한 ‘우리의 김씨’는 남대문 시장을 드나드는 여러 오토바이를 보며 떠올린 곡으로, 그들의 일상생활 가운데 애환을 담았다. 내슈빌발 컨트리 넘버를 듣는 듯하다. 조동익이 작곡한 ‘이 세상 사람이’는 비슷한 시기 최성원이 기획한 옴니버스 앨범 [우리노래 전시회]에도 수록되었던 곡으로,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스타일의 프로그레시브한 전개가 독특하다. 이 음반에서 주목해야할 트랙은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와 ‘얘기’다. 두 번째 음반의 ‘바둑’이 양병집이 스스로 작곡한 정태춘 스타일의 곡이라면, 이 음반의 두 곡은 정태춘이 직접 작곡한 곡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양병집의 스타일에 정태춘의 곡이 가장 맞는 스타일이라는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음반이 세상에 나오고 1년이 지난 1986년, 양병집은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물론 현재는 영구 귀국했지만 호주에 있으면서도 일시 귀국해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고, 이민을 떠나기 전 동서남북을 발굴하거나 이영재, 이승희, 최성원의 음반 매니지먼트를 했던 것처럼 16년 차이의 음반을 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음악을 통한 금전적 보상은 언제나 그와는 별개의 것으로 보였다. 청자가 듣기엔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음반의 아쉬움을 그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그는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뮤지션을 발굴하고 또 그들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아마 자신이 이야기했던 아쉬움을 후배들은 되풀이하지 않게 만들려 하는 그의 바람 때문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넋두리]가 우리 대중음악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렵사리 이어진 두 장의 음반들은 오히려 [넋두리], 혹은 ‘저항가수’라는 이미지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번 재발매를 통해 초기 양병집의 독특한 음악세계가 재평가 받을 수 있길 바란다. (20160420)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