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ONER'S MUSIC LIFE/BEHIND THE SCENES

김광한 선배님. 이제 편히 쉬세요.

1. 사실 ‘김광한’이란 이름은 그냥 책이나 소문에서만 접할 수 있었다. 피세영, 최동욱, 이종환, 박원웅, 김기덕 혹은 백형두처럼. 어떻게 생각하면 손에 잡을 수 없는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다고 할까. 그 이유는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은 비교적 늦게 FM의 혜택을 받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팝음악에 관심을 갖던 무렵인 중학생 시절에 처음 개국한 KBS1-FM은 클래식 전문 방송이었다. 팝음악을 소개했던 방송은 로컬 프로그램인 ‘서상철의 팝스 98.5’가 전부였다. 한 곡이라도 더 듣고, 하나라도 더 알고 싶던 시절 그렇게 김광한이라는 이름은 그저 고유명사 이외의 의미가 되지 못했다. 때가 되면 KBS 방송국 앞을 서성이거나 인켈 대리점에 들러 챙겼던 ‘포코(Poko)’는 “이런 곡은 또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 더해줄 뿐이었다.




2. AM 주파수를 잘 돌리다보면, 대전에서 송출하는 방송 말고 서울에서 하는 방송이 직접 잡힐때가 있었다. 황인용 선배님이 진행하는 방송이었는데, 귀여운 목소리의 영어 선생님 ‘미스 색’이 패널로 출연하는 ‘영어 한 마디만’이라는 고정꼭지가 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나에게 김광한이라는 이름을 비로소 실체로 만들어줬다. 신호가 약해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 듣는다고 해도 음악이나 멘트보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더 많은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출연했던 김광한 선배님은 로컬 방송에서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나에게 들려줬다. 당시 선배님의 소개로 들었던 곡 가운데 기억나는 대표적인 곡은 애니메이션 [Heavy Metal O.S.T.]에 삽입됐던 크로커스(Krokus)의 리메이크곡 ‘American Woman’과 고고스(Go-Go’s)의 데뷔앨범 수록곡 ‘We Got The Beat’다.


3. 대학시절 몸 담았던 동아리는 ‘아마추어 디제이 클럽’이다. 사실 내가 가입할 무렵엔 디제이라는 성격보다는 음악 감상의 의미가 강했지만, 동아리를 처음 만들었던 선배들은 당시 다운타운가에서 디제이 아르바이트하던 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동아리에서 했던 행사 가운데 가장 큰 행사는 1년에 한 번 있는 ‘디스크플레이’였다. 일종의 공개 음악감상회라고 할 수 있는 이 행사. 선배들은 1회 디스크플레이 때 사진에 나온 김광한 선배님의 모습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행사를 축하해주기 위해 하객으로 참석하신 모양이었다. 지방의 한 대학 동아리의 행사를 보기 위해 내려오신 당시 ‘가장 잘 나가던 디제이’. 김광한 선배님은 그렇게 내 머릿속에 또 하나의 기억을 남겨 놓으셨다.


4.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후 진로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후배 정미는 김광한 선배님이 운영하는 사무실 ‘뮤직 코리아’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해 줬다. 그냥 무작정 올라갔던 것 같다. 물어 물어 간신이 찾아갔던 사무실. 당시 선배님은 자리를 비우고 다른 직원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과 사무실 근처의 커피숍에서 여러 얘기를 나눴다. 얘기 중에 알았지만 그 여직원분은 내 대학 1년 선배였다. 그 분의 이야기는 단호했다. 확실한 결정을 하라는 얘기였다. “음악이 좋아서 일을 하는 건 좋지만 금전적인 부분을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지방에서 올라와 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한다”는...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우유부단했던 성격이었던 그 때, 또 막연한 두려움으로 혼란을 느끼던 그 때. 결국 난 김광한 선배님은 만나지도 못하고 대전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5. 1999년 7월 14일, 대전교통방송이 개국됐다. 핫뮤직을 퇴사하고 내려온 유길이형이 처음 맡은 프로그램은 매일 오후 10시부터 12시까지 흐르던 ‘조화진의 밤의 데이트’였다. 유길이형의 도움으로 난 7월 14일 개국날부터 게스트로 출연했다. 하지만 ‘밤의 데이트’는 한 텀만에 ‘낭만이 있는 곳에’라는 프로그램으로 바뀌었고 진행을 맡았던 조화진씨는 국군방송으로 직장을 옮겼다. 새롭게 진행을 맡은 분은 지금은 세상을 떠난 팝음악 평론가 겸 진행자 김일영 선배님이었다. 게스트 활동은 ‘김일영의 낭만이 있는 곳에’로 이어졌다. 김일영 선배님은 두 텀 정도 방송을 진행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새롭게 마이크를 잡은 분이 김광한 선배님이다. 김광한 선배님이 오실 거라는 소문을 들으며 난 들떴다. 드디어 전설의 디제이와 함께 방송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김광한 선배님이 방송을 맡으며 난 게스트에서 하차했다. 당시엔 무척 안타까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감히 그 분 앞에서 내가 어떤 음악 얘기를 풀어내고 또 어떤 음악을 선곡할 수 있었을까.


6. 게스트에서는 하차했지만 유길이형이 계속 방송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날 방송이 끝난 뒤 난 결국 김광한 선배님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평근이형이 운영하는 LP 카페 ‘전기줄 위의 참새’에서 선배님은 연신 디제이에게 신청곡을 주문하셨다. 그러다가... “그 누구지? ‘Hello Again’...” 갑자기 생각이 안 나셨나보다. 난 “아... 토미 볼린요?”라고 했지만, “아니 토미 볼린 말고.... 아 맞다 카스(Cars)!”. “어, 카스도 ‘Hello Again’이 있나요?”.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말 그대로 뻔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격이 아닌가. 어쨌든 방송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선배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방송국 밖에서 처음 이뤄져 ‘낭만이 있는 곳에’의 진행자가 바뀐 뒤에도 이어졌다. 학전 소극장에서 열린 들국화 재결합 콘서트는 선배님과의 또 다른 추억으로 남아 있다.





7. 2004년 4월 1일, 핫뮤직에 입사했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에게 떨어진 기사는 김광한 선배님 인터뷰였다. 마포의 조그만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이미 음악세계에 연재됐던 기사들로 예습을 하긴 했지만, 사무실에 갈 땐 공책과 필기도구만 챙겼던 나에게 선배님이 물어보신 건 녹음기를 가져왔는가 하는 거였다. 안 가져왔다고 하니 선배님은 인터뷰할 땐 꼭 녹음기를 챙기라며 갖고 계시던 MD 플레이어와 마이크를 빌려주시고, 빈 MD하나를 주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첫 인터뷰 MD는 이후 인터뷰를 꼼꼼히 녹음하는 습관을 남겨줬다. 그 뒤 내가 오히려 선배님께 인터뷰를 당한(?)일도 있었다. 특히 영상 기록으로 남겨두는 걸 즐겨했던 선배님은 한국 락음악에 대한 인터뷰를 하시며 캠코더로 촬영을 하셨다. 2007년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을 때, 꼭 한 번 보자고 연락하셔서 이후 서울에 찾아가 좋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던 기억도 있다.


마구 펑펑 울었습니다. 남자가 오랫만에 눈물을 흘렸습니다.그것도 후배앞에서 어쩔수 없는 눈물이 마구마구 흘렸지요.월간팝송, 음악세계, 그리고 이런저런 음악잡지들이 있었죠.Hot Music... 처음엔 식당메뉴 ...

Posted by 김광한 on Tuesday, June 19, 2012


8. 2012년 파라노이드의 창간호가 나왔다. 김광한 선배님은 가장 먼저 찾아간 선배 가운데 한 분이었다. 역시 찾아갔을 때의 이야기는 선배님의 카메라에 담겨 페이스북의 동영상으로 남았다. 선배님을 찾아간 다음 날, 까미 스튜디오에 찾아갔을 때 기정씨가 나에게 얘기해줬다. “페이스북 봤어요? 김광한 선생님이 펑펑 울었다고 글 올리셨던데...” 사실 난 그 때까지 페이스북을 확인하지 못했다. 책이 나오고 계속해서 돌아다니는 바람에 제대로 지난 포스트들을 체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보게 된 동영상. 오히려 내가 펑펑 울고 싶었다. 그 뒤로도 선배님은 보는 분들마다 파라노이드 홍보를 해 주셨고, 필자 모임이 있을 땐 커다란 핏자 한 판을 들고 찾아오시기도 했다. 기사를 위해 찾은 공연장에서 가장 자주 마주친 선배는 단연 김광한 선배님이셨다.






9. 2015년 6월 30일 뮤지스땅스에선 예전 히식스와 위대한 탄생의 멤버들이 모여 결성한 파파스 밴드의 결성 신고식 겸 미니 콘서트가 열렸다. 김광한 선배님은 이 공연의 사회를 자처하셨다. 공연이 끝난 뒤, 정리하는 시간 동안 위에 올라가 있으려던 나를 선배님은 불러내렸다. “야... 넌 아직 네가 기자라고 생각하니? 넌 경영자야. 이런 데서 계속 인사하고 도와달라고 얘기하고 다녀야지!”하시며 만나는 분들마다 붙잡고 오히려 이렇게 얘기하셨다. “이 친구 찾아갈 거니까 내 얼굴 봐서 꼭 광고 해줘.” 그렇게 인사한 분들이 몇 분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뒤풀이로 이어지는 시간까지 선배님은 계속해서 나에게 경영자가 해야할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셨다.





10. 2015년 7월 8일, 현준이의 페이스북에 김광한 선배님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위독한 상태라는 글이 올라왔다. 믿기지도 믿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1주일 전에 만났을 때 그렇게 정정하던 모습을 보여줬던 선배님이. 기도했다. 종교는 없지만 그 대상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힘찬 모습 보여주시길 기도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받은 현준이의 문자엔 힘이 없었고, 다음 날 다시 현준이의 전화를 받았다. 그렇게 선배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동아일보의 임희윤 기자는 현준이와 얘기했던 걸 인용해서 랜덤으로 플레이하는 음악인데도 문상객에게 맞춘것과 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단 기사를 썼다. 예를 들어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팬클럽이 문상 왔을 땐 누가 일부러 선곡이나 한 것처럼 마이클 잭슨의 곡이 흘러나왔다는. 내가 마지막 인사를 드릴 때 나왔던 음악은 카펜터스(Carpenters)의 ‘Yesterday Once More’다. “When I Was Young I Listen To The Radio Waiting For My Favorite Songs...” 선배님이 돌아가시고 정말 오랜만에 2004년 기자 초년병 시절 인터뷰를 다시 꺼내봤다. 인터뷰의 가장 마지막에 김광한 선배님은 이런 얘기를 남기셨다. “개인적으로는 죽는 날까지 팝 음악과 함께 살고싶다. 팝과 같이 있지 않으면 어딘가 재미가 없는 삶이 아닌가?”


아직도 믿고싶지 않지만... 김광한 선배님 이제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