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V Unplugged (Live)]는 지난 2015년 8월 19일, 플라시보가 첫 공연을 펼쳤던 런던 스튜디오에서 단 한차례 열린 공연을 담은 실황이다. 일곱 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하고 1,200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플라시보(Placebo)는 지난 앨범들의 바이널(vinyl) 리이슈, B 사이드 싱글 공개 등 스스로 결성 20주년을 자축하는 일련의 활동들을 해 오고 있는데, 이 공연과 라이브 앨범의 발매는 어쩌면 그러한 활동의 정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음악 전문 채널 MTV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인 MTV 언플러그드(unplugged)는 TV로 방영됐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1968 컴백 스페셜(1968 Comeback Special)’, 비틀스(The Beatles)의 스튜디오 잼을 담았던 다큐멘터리 ‘렛 잇 비(Let It Be)’에서 착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우리에겐 ‘정치범 구제를 위한 콘서트’로 알려졌고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개최되어 음반으로도 발매된 바 있는 ‘시크릿 폴리스맨스 아더 볼(The Secret Policeman's Other Ball)’은 악기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효과’를 실험하는 뮤지션들에 의해 점차 복잡하게 흘러가던 음악판에서 단출한 편성과 소박한 편곡, 그리고 ‘뼈대’에 근접한 가창의 매력을 일깨워주었으며, 1980년대로 접어들며 주류에서 벗어났던 어쿠스틱에 기반을 둔 포크에 대한 관심 역시 증가했다. 이러한 흐름 모두 MTV 언플러그드가 태동하는 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MTV 언플러그드는 1989년에 시작됐다. 과거 음악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현재 활동하고 있는 ‘핫’한 뮤지션들의 이면, 혹은 진솔한 모습을 공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치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휘발성의 방송으로만 끝나지 않고, 음반이나 DVD 등의 상품으로 연계되어 1992년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의 잭슨 파이브(The Jackson 5) 커버곡 ‘I'll Be There’를 빌보드 싱글차트 넘버원에 올려놓은 바 있으며,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에게 6개의 그래미 영예를 안겨준 바 있다. 그리고 이후 뮤지션들이 MTV의 무대가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레퍼토리들을 언플러그드로 새롭게 편곡한 공연을 열거나 음반을 녹음해 발표할 정도로 그 파급력은 대단하다.
MTV에서 처음 연락을 받고 브라이언 몰코(Brian Molko)와 스테판 올스달(Stefan Olsdal)은 단지 피아노 앞에 앉아 곡이 가진 있는 그대로의 뼈대만 보여주는 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청중과 밴드가 동일한 흥분을 가질 수 있는 공연을 펼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음악에 담기위해 밴드의 기본편성 외에 4대의 바이올린과 2대의 첼로를 기본으로 더블 베이스, 플루트, 베이스 클라리넷 등 실내악 편성을 추가시켰으며, 세트리스트에 따라 독특한 악기를 첨가했다. 그리고 브라이언 몰코가 “가장 커다란 도전은 우리 곡을 새롭고 매력적이게 재창조하는 것이었다”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플라시보는 올해 밴드를 떠난 드러머 스티브 포레스트(Steve Forrest)를 대신해 스틱을 잡은 매트 룬(Matt Lunn)을 비롯한 수많은 게스트 뮤지션들에게 기존 곡의 안전한 답습대신 ‘Bosco’와 같이 공연을 통해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던 곡처럼 작업할 것을 요구했다.
사실 전기 기타의 지속적인 다운 스트로크에 의한 점진적인 몰입은 플라시보의 전형적인 사운드 직조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언플러그드 라이브를 위해 밴드는 이렇게 만들어진 직조물의 씨실과 날실을 완전히 풀어헤치고 새로운 재료와 방법으로 직물을 짜내려갔다. 물론 이전 플라시보의 음악에 기본 밴드구성의 악기 외에 다른 어쿠스틱 악기들이 사용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실내악 편성의 소규모 악단의 주도적 참여는 앞서 브라이언 몰코가 이야기했던 ‘새롭고 매력적인 재창조’가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렇게 재창조된 연주에 입혀지는 브라이언 몰코 특유의 보컬 바이브레이션은 우리가 익히 들어 익숙한 세트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플라시보와의 첫 만남이 그랬던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때문에 공연장의 관객석에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CD로 음악을 듣고 있을 뿐인데도 기침이라도 나올까 조심스럽다.
음반 수록곡들은 밴드의 20주년을 자축이라도 하듯, 지난 일곱 장의 스튜디오 음반과 커버 음반 한 장에서 비교적 다양하게 선곡([Placebo](1996) 1곡, [Without You I'm Nothing](1998) 2곡, [Black Market Music](2000) 1곡, [Sleeping With Ghosts](2003) 2곡, [Covers](2003) 2곡, [Meds](2006) 4곡, [Battle For The Sun](2009) 1곡, [Loud Like Love](2013) 4곡)됐고, 라이브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트랙도 포함됐다. 수록곡의 원곡이 담긴 음반들은 다음과 같다.
1. Jackie [Covers](2003) Originally Recorded By Sinéad O'Connor
2. For What It's Worth [Battle For The Sun](2009)
3. 36 Degrees [Placebo](1996)
4. Because I Want You [Meds](2006)
5. Every You Every Me (Feat. Majke Voss Romme Aka Broken Twin) [Without You I'm Nothing](1998)
6. Song To Say Goodbye [Meds](2006)
7. Meds [Meds](2006)
8. Protect Me From What I Want (Feat. Joan As Police Woman) [Sleeping With Ghosts](2003)
9. Loud Like Love [Loud Like Love](2013)
10. Too Many Friends [Loud Like Love](2013)
11. Post Blue [Meds](2006)
12. Slave To The Wage [Black Market Music](2000)
13. Without You I'm Nothing [Without You I'm Nothing](1998)
14. Hold On To Me [Loud Like Love](2013)
15. Bosco [Loud Like Love](2013)
16. Where Is My Mind? [Covers](2003) Originally Recorded By Pixies
17. The Bitter End [Sleeping With Ghosts](2003)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곡은 시네이드 오코너(Sinéad O'Connor)의 곡을 커버해 [Covers](2003)에 수록했던 ‘Jackie’다. 요란하진 않지만 청자의 중심을 쉽게 무너트렸던, 전기의 흐름이 만들어낸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무게와 신비한 느낌을 주는 튜브의 회전이 그려낸 몽환적 느낌의 무게가 동일한 압력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분명 새로운 편곡과 편성이 기존 곡과는 어쩌면 반대편에 위치할 정도로 거리가 먼 것 같지만 플라시보라는 한 단어 안에서 물리적인 거리로서의 의미는 불필요하며, 짧은 오프닝 곡에서 들려준 이러한 경향은 음반 전체의 교집합으로 작용한다.
‘For What It's Worth’는 스튜디오 앨범 [Battle For The Sun] 녹음 당시 드러머 스티브 포레스트(Steve Forrest)가 장난감 건반으로 연주했던 짧은 ‘하이든의 세레나데’ 테마가 정식으로 실내악의 옷을 입고 등장하며 원곡의 ‘뼈대’를 일깨워준다. ‘Because I Want You’나 ‘Meds’와 같은 곡은 이미 공연이나 여타 세션을 통해 어쿠스틱 버전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 음반의 버전은 ‘작정하고’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새로운 느낌이다.
한 장의 공식음반을 발표한 덴마크의 여성 싱어 송 라이터 마이크 보스 로마(Majke Voss Romme) 혹은 브로큰 트윈(Broken Twin)이 참여한 대표곡 ‘Every You Every Me’는 원곡에 비해 느린 템포로 편곡됐고, ‘Protect Me From What I Want’에서는 전기적 효과가 모두 배제된 자리에 브라이언 몰코의 하모니카가 위치하며 게스트로 참여한 존 애즈 폴리스 우먼(Joan As Police Woman)의 보컬과 함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이렇게 새롭게 태어난 플라시보의 기존 곡들은 우주를 헤매는 유영도, ‘닌텐도’ 게임을 떠오르게 만드는 혼돈스런 효과 없이도 원곡의 느낌과는 별개로 혹은 동일하게 청자를 이끈다.
스테판 올스달은 자신의 포지션인 베이스 기타 외에도 피아노는 물론 ‘Post Blue’에서는 밴드가 모로코에 갔을 때 발견한 민속악기 카눈(qanun)을, ‘Slave To The Wage’에서는 인도의 민속악기 슈루티 박스(shruti box)를 개량시킨 슈루티 드론 박스(shuruti drone box)를 연주하며 그동안 이펙트를 이용해 만들어왔던 사운드를 색다르게 재현한다. 동양적인 느낌인가 했더니 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원곡에 비해 느린 편곡이 많아 숙연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검은 단발과 스모크 화장, 검은 의상의 브라이언 몰코의 외향과 잘 어울린다.
혹시 음반 뿐 아니라 DVD나 블루레이로 이 공연을 즐기는 청자라면 단순한 듯 보이지만 뚜렷한 인상을 각인시키는 단색 조명의 움직임이 직선으로 그려내는 이미지, 페퍼의 유령(Pepper's Ghost; 극장 등에서 사용되는 시각 트릭으로, 판유리와 조명 기술로 실제 상과 판유리에 있는 ‘유령’이 겹쳐 보이는 효과. 1862년, 존 헨리 페퍼가 시연했다)를 연상시키며 관객과 무대 사이의 투명한 막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분위기가 새롭게 태어난 플라시보의 음악과 얼마나 큰 시너지를 만드는 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발표된 MTV 언플러그드 음반들을 그저 편안하게 감상하기 좋다는 선입견 속에 접해왔다면, 이번 플라시보의 음반을 접하기 전에 단단히 마음을 고쳐먹는 게 좋다. 분명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과거의 음악이지만, 모든 것이 새롭다. 그리고 새롭지만 어색하지 않다. 어쩌면 같은 곡의 두 번째 버전이 아니라 완전하게 재창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한 열일곱 곡의 트랙이 CD의 수록 한계에 육박하는 75분의 러닝타임에 담겼다. 20주년을 맞는 플라시보의 자축이 그저 과거회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이라는 브라이언 몰코, 그리고 스테판 올스달의 의지에 다름 아니다. “MTV 언플러그드는 우리에게 우리 음악의 더욱 실험적인 측면과 어쿠스틱한 부분을 탐구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브라언 몰코의 이야기. 이 한 장의 음반과 함께 분명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20151119)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