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선 [Ten Unplugged]

연륜과 함께 원숙하게 무르익은 이정선 음악의 확실한 방점

이정선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다. 1973년 YWCA 대강당에서 열린 ‘이정선 노래 발표회’를 통해 데뷔했고, 이듬해인 1974년 소위 ‘-1집’으로 불리는 첫 번째 음반 [이정선 노래모음]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가요계에 이름을 올린 싱어 송 라이터. 비슷한 시기에 음반을 발표한 포크 싱어들은 많았지만, 작사와 작곡에서 편곡까지 스스로 담당한 음반을 발표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방면에 있어서는 선구자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록곡 가운데 ‘거리’를 비롯한 9곡이 심의 불가를 받아 음반은 거의 유통되지 못하고 시장에서 사라지고 만다. 결국 정식 데뷔앨범은 1975년에 발매되었고, 이 음반에 수록된 ‘섬소년’이 히트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솔로활동과 병행하여 1974년 여름부터 1977년 여름까지 매주 토요일 명동 가톨릭 여학생회관에서 ‘해바라기 음악회’를 가지며 한영애, 김영미, 이주호(혹은 이광조)와 포크 쿼텟 해바라기를 결성하여 두 장의 공식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진주에서 디제이로 활동하던 엄인호를 발탁해 이광조와 함께 풍선을 결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자신의 개인 활동 외에도 두 송이, 영주와 은주, 선우혜경, 정종숙, 한영애는 물론 황은미 문채지, 노사연, 김학래 임철우, 김만준 등 초창기 대학가요제 출신 신인 뮤지션의 음반에 작곡자 겸 편곡자로 참여했다. 1986년에는 신촌의 클럽 ‘레드 제플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멤버들을 규합하여 신촌 블루스를 결성, 토착화된 블루스 보급에 앞장섰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이정선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음악활동은 물론이이고, 1985년 <이정선 기타교실>이라는 교본을 만들어 국내 기타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전까지 기타 교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체계적인 그의 기타 교본은 기타를 처음 입문하는 초보자에서부터 숙련된 고급과정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기타를 배우는 기타 키즈들에게는 친절한 안내서로, 또 기타학원의 교재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정선의 10집은 ‘언플러그드(Unplugged)’라는 타이틀로 1994년 발매됐다. 타이틀 때문에 언뜻 전체가 어쿠스틱 악기로 꾸며진 음반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이정선 스스로가 일렉트릭 기타보다 의도적으로 어쿠스틱 기타를 음반에 주로 사용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하다. 그 배경에는 음반 발매 당시 불어 닥쳤던 ‘언플러그드 라이브’의 ‘유행’ 역시 간과할 수 없다. 1989년 음악 전문 케이블 방송인 MTV에서 시작해 정규 프로그램 편성, 음반 제작으로 이어진 언플러그드 라이브가 음악계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언플러그드 라이브 방송의 세계적인 유행에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잠시 1993년 신문기사 하나를 보자.

(전략) 또 미국의 음악 전문 TV 채널인 MTV에서는 언플러그 뮤직의 소규모 라이브 공연실황을 고정적으로 방송, 호응을 얻고 있고 머라이어 캐리와 같은 인기가수가 이 흐름에 편승하면서 한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MBC FM ‘배철수의 음악캠프’(연출 조정선)가 지난달 언플러그드 뮤직 특집을 꾸미면서 국내 가수들을 대거 참여시켜 붐을 조성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가수로는 사랑과 평화, 빛과 소금, 피노키오, 신촌 블루스, 이정선 밴드 등 그룹과 김수철, 윤시내, 김종서 장혜진, 신승훈, 변진섭, 이덕진, 한영애, 이광조, 최백호 등이 참여했다. 이들 중 신승훈, 변진섭, 이광조 등은 자신들의 히트곡이 언플러그드적인 요소가 많아 흡인력이 강했고 김종서 등 록적인 분위기로 노래했던 가수들도 어쿠스틱한 스타일로 노래를 새롭게 선보였다. 한편 그룹 빛과 소금은 현재 후속앨범을 통해 언플러그드 뮤직 특집을 구상중이고 콘서트도 마련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김수철은 “국악가요의 대중화 작업과 함께 전기기타를 쓰지 않는 음악활동을 적극 펴나갈 것”이라며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후략) 
- 경향신문 1993년 2월 6일, 언플러그드 뮤직 가요계에 신선한 바람

이렇게 국내에서도 MBC FM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통해 관심을 끌기 시작한 언플러그드 무대는 곧바로 TV로 이어졌다. 같은 해 3월 21일, MBC TV는 신춘특집으로 이승환, 이정선, 빛과 소금, 해바라기가 출연한 언플러그드 뮤직 콘서트 ‘음악이 있는 곳에’를 60분 동안 방영했다. 그리고 ‘음악이 있는 곳에’는 아예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어 4월 18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매주 이어졌다. 이정선은 빛과 소금의 장기호와 박성식, 11월의 장재환, 조준형과 함께 이 프로그램의 연주자로 고정 출연했다. 또 사람과 나무는 코러스를 담당했다. 이렇게 ‘음악이 있는 곳에’에서 맺어진 인연은 자연스레 준비하고 있던 이정선의 10집 음반으로 이어졌고, 재킷에 ‘UNPLUGGED’라는 타이틀을 선명하게 새기는 단초가 됐다. 이들은 대학로 라이브 홀에서 1994년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에버그린 밴드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이정선은 이 앨범에 앞서 발표한 9집 [雨](1990)를 통해 이미 8집 [Ballads](1988)부터 시작했던 이정선식 성인음악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정선식 성인음악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인가요’가 아니고, 7집 음반인 [30대](1985)에서 보여준 날카로운 날을 의도적으로 무디게 갈아내, 편안하고 완만한 곡선으로 접근한 음악이다. 인터뷰를 통해 그는 ‘나이를 먹어서’라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그가 이야기한 ‘나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나이 뿐 아니라 음악에 있어서의 ‘연륜’과 ‘경험’ 역시를 포함하는 단어라는 건 음악을 듣는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음반에 적힌 그의 코멘트인 “언제부턴가 어깨를 짓누르던 음악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에서 해방되었고 가뜩이나 시끄러운 세상에 또 다른 소음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에서도 벗어났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포크와 블루스를 표방했을 무렵도 마찬가지지만, 그의 스타일은 또 다른 접근이라고 할지라도 동시대에 존재하는 비슷한 부류의 음악들과는 의도적인 거리를 둔 듯 확실한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플러그드’라는 단어가 타이틀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접근방법은 많이 다르다. 

10집 음반은 지난 이정선의 음반들에 비해 확실히 차분하고 정적이다. 그의 기타 연주는 좀처럼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전체적인 조화에 치중한다. 오히려 보컬을 제외한다면 ‘너를 생각하며’는 피아노, ‘고향길’에서는 김정림이 연주한 해금이 주인공이다. 하모니카 연주곡 ‘기다림’ 역시 펑키한 퓨전 성향의 연주에 자신의 자리를 많이 내어준다. ‘기다림’에서 들을 수 있는 전통음악과 포크의 접목은 비슷한 시기 MBC TV의 퓨전 국악 프로그램 ‘샘이 깊은 물’에 편곡 및 연주자로 출연한 것과도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으며, 풍선 시절의 ‘통영 개타령’ 혹은 9집의 ‘상사타령’과 같이 계속되는 그의 관심을 짐작하게 만든다. ‘노랑나비’는 여러모로 1970년대 후반 해바라기의 음악을 연상시키지만 아쟁의 효과적인 활용으로 그 느낌은 확실하게 다르다. 그런가 하면 박선주가 작곡한 보사노바 넘버 ‘시간 속에서’, 가벼운 레게 느낌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룸바 리듬의 ‘거울 속의 얼굴’ 등에서는 월드뮤직과 다리를 놓는 이정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정선의 음악 활동에 있어서 가장 활발하게 방송에 출연했던 이력은 KBS TV 드라마 ‘밥을 해주는 여자’ 주제곡 ‘연민’과 EBS 라디오 ‘사랑의 한 가족’의 시그널 ‘설레임’이라는 흔적 역시 음반에 남겼다. 

 


이정선은 10집을 발표하고 9년이 지난 2003년 11집 [Hand Made](2003)을 공개했다. 이 앨범은 지금까지 이정선이 발표한 마지막 음반이다. 물론 그는 지금도 꾸준한 공연을 펼치며 팬들과 소통하는 일을 게을리 하고 있지 않다. 1990년대 이후 이정선의 활동은 음반이나 공연 할 것 없이 어쿠스틱 위주의 활동이다. 이벤트 성격으로 모였던 신촌 블루스 공연이나, 2012년 레코드 페어에서의 특별 공연 이외에 그가 일렉트릭 기타를 잡은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이정선의 10집 앨범은 이후 이어질 그의 활동에 대한 복선, 혹은 확실한 방향을 선정한다는 성격으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앨범이다. 짧은 러닝타임이 아쉽긴 하지만 연륜과 함께 원숙하게 무르익은 이정선 음악의 확실한 방점이다. (20200401)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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