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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MUSIC LIFE/LINER NOTES (DOMESTIC)

윤시내 [윤시내 새노래 모음]

가수를 염두에 둔 작곡, 가수의 독특한 개성, 시대를 앞선 편곡과 연주가 맞물린 문제작.

1977년 문화방송과 경향신문 주최로 제1회 서울가요제가 열렸다. ‘당신만을 사랑해’로 최우수 작품상과 인기상을 받은 혜은이가 작곡가 길옥윤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장면과 진미령이 ‘소녀와 가로등’을 부를 때 16살 어린 나이에 악단을 지휘하던 장덕의 앳된 모습이 생생한 이 행사는 해를 넘기며 해외 뮤지션이 참가하는 서울국제가요제로 거듭났다. 1978년 5월 27일 서울국제가요제에 출전할 팀을 선발하는 국내 예선이 열렸다. 두 차례의 예선을 거친 20팀이 출전한 최종예선에서는 야마하국제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할 정미조의 ‘아 사랑아’ 외에 서울국제가요제에 출전할 ‘너를 보았네’ (이예나), ‘사랑의 합창’ (방은미), ‘더욱 큰 사랑’ (장현), ‘토함산’ (송창식), ‘공연히’ (윤시내), ‘내님아’ (김민), ‘당신의 꿈을 나에게’ (이세진), ‘곡예사의 첫 사랑’ (박경애) 그리고 ‘바늘과 실’ (윤복희)까지 총 9곡이 선발됐는데, 이 가운데 일본 곡 표절로 드러난 ‘내님아’와 기 발표곡인 ‘당신의 꿈을 나에게’가 다시 탈락하고 차점을 받은 ‘무지개 피는 곳에’ (정재은), ‘장미의 여인’ (숙자매)이 본선 무대를 밟았다. '78 MBC 서울국제가요제 본선은 1978년 7월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됐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입석까지 모든 티켓이 매진되며 이렇다 할 해외 뮤지션의 내한공연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당시, 처음 열리는 국제가요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컸다. 또 음악평론가 최경식이 당시 신문에 “국내외의 새로운 가요들이 우리 가요의 질적 발전을 위한 좋은 방향제시가 되길 바란다.”라고 기고했을 정도로 음악계 역시 들뜬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가요제 출전곡을 담은 음반은 발매 2주 만에 만장의 판매고를 돌파했다. 어쩌면 1977년 개최된 제1회 서울가요제는 기성 가수와 작곡가들이 참여하며 역시 문화방송과 경향신문 주최로 같은 해 시작된 대학가요제와 함께 가요계의 또 다른 한 축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필리핀의 하지 알레얀드로가 부른 ‘How Beautiful Our Love Is!’가 대상을 받은 본선에서 국내 뮤지션은 윤복희의 ‘바늘과 실’이 최고 가창상을, 송창식의 ‘토함산’이 우수 가창상을, 그리고 정민섭이 작사/작곡한 박경애의 ‘곡예사의 첫사랑’이 최우수 국내 작곡상의 영예를 안았다. 지금까지도 참여 가수의 대표곡으로 꼽히고 있는 이 곡들은 한 결 같이 큰 스케일의 전형적인 가요제 스타일의 참가곡들이다. 하지만 이들과 전혀 다른 스타일로 입상권엔 들지 못했지만 가요제 이후 입상곡 만큼이나 화제를 모았던 곡이 있다. 바로 최종혁이 작곡한 윤시내의 ‘공연히’다.

 

 

윤시내는 독특한 창법은 물론 피라미드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과 1970년대에 공연했다면 간첩에게 보내는 신호로 오인 받았을 법한 독특한 율동(실제로 1970년대 초 김추자나 김정미의 춤동작은 이런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으로 일약 화제의 중심에 올라섰다. 윤시내는 다른 뮤지션과 달리 밴드를 대동하고 무대에 올랐다. 밴드의 이름은 우리에겐 이후 영화와 드라마 음악 작곡가로 잘 알려진 신병하가 이끌던 사계절이다. 사계절에는 신병하와 윤시내 외에 유현상, 연석원을 비롯 라스트 찬스를 거쳐 이후 벗님들에서 활동하는 이순남이나 김희현 등이 거쳐 갔다. 사계절이 결성된 건 1975년 이전이다. 그때 밴드명은 사계절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신병하가 이끄는 밴드는 이미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미8군 활동 당시 리드 싱어 중 한 명이던 김희경이 미국으로 떠나며 윤시내 혼자 보컬을 담당했다. 신병하의 밴드는 점차 시들해지는 미8군 무대를 떠나 일반 무대로 진출했다. 그리고 킹 레코드의 대표 킹박(박성배)이 1975년 소위 ‘대마초 파동’이 터진 뒤 이태원의 유엔 클럽이나 해밀턴 클럽에서 활동하던 신병하를 찾아왔다. 신중현 사단의 음반을 비롯해서 소위 통기타 부대로 불리는 양희은, 서유석, 송창식 등의 음반을 제작했던 킹박은 당시 업계의 가장 ‘큰 손’이었다. 수완 좋은 킹박이 ‘긴급조치 9호’로 활동을 접어야 했던 김추자와 김정미의 대안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신병하의 인터뷰에 따르면 킹박은 윤시내를 김추자 같은 색깔로 포장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킹박과 손을 잡은 신병하는 오비스 캐빈과 소공동의 포시즌을 거점으로 활동의 범위를 넓혔다. 밴드의 이름이 사계절로 결정된 건 그의 활동무대 ‘포시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윤시내는 이미 동방의 빛이 음악을 담당했던 영화 ‘별들의 고향’(1974)에 ‘나는 19살 이예요’라는 곡으로 참여한 바 있다. ‘나는 19살이에요’에서 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처음 들었을 때 윤시내의 음성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음색과 다르다. 당시 윤시내는 무대에서 부르던 마이클 잭슨의 ‘Maria’를 염두에 두고 녹음을 진행했다고 한다. 신병하와 윤시내가 함께 만든 첫 결과물은 1976년 옴니버스 앨범 [Hit Rotary Vol.1](서라벌, SLK-1005, 1976)에 담겼다. 최헌, 김훈과 트리퍼스, 양희은, 서유석 등의 기존 곡이 담긴 음반이지만, 이 음반에는 신병하가 작곡하고 윤시내가 노래 부른 신곡 ‘새야 날아봐’와 ‘정말 그럴까’가 담겼다. 음반 재킷에 등장하는 사진 역시 윤시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시내가 참여한 사계절의 첫 독집 [정말 바보일까 / 배 / 님생각 / 그 말 잊었나](서라벌, SLK-1012, 1976)가 뒤를 이었지만, 특유의 솔(soul) 스타일 창법과 샤우팅으로 기억되는 윤시내의 특징은 오히려 [Hit Rotary Vol.1]에 수록된 ‘새야 날아봐’에서 잘 드러난다. 

이 음반이 발매된 1976년은 사랑과 평화도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이었고, 펑키/디스코의 국내 유행 역시 시작되기 전이다. 1979년 일간스포츠의 ‘그룹사운드 본격적 활동’이라는 기사가운데 “레코드가에서 6년여 동안 인기를 잃었던 그룹사운드가 1978년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 최근 들어 빅히트를 연타하면서 본격적인 그룹사운드 시대의 막을 올렸다.”는 내용에서 볼 수 있듯, ‘긴급조치 9호’와 ‘대마초 파동’이라는 직격탄을 맞은 국내 밴드 음악 신(scene)은 좀처럼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던 시기였다. 비록 윤시내라는 솔로 가수의 곡으로 발표되긴 했지만 사계절이라는 밴드의 연주로 취입한 곡, 그리고 그 밴드와 함께 가요제에 출전한 것은 어쩌면 이후 이어질 국내 밴드 음악의 제2라운드를 예고하는 복선과도 같았다. 이후 윤시내는 1977년 ‘삼립 호빵’, ‘해태 다람쥐 사탕’을 비롯한 몇몇 CM송을 불렀지만 그렇게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리고 1978년, 작곡가 최종혁의 ‘공연히’로 서울국제가요제에 참가했다. 최종혁은 10여년 동안 주로 편곡 생활을 하다가 1977년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작곡하면서 작곡가로서의 이름을 알렸다. 장재남의 ‘빈 의자’ 역시 최종혁이 작곡한 히트곡이다. 최종혁이 사계절에서 열창하는 윤시내의 개성을 알아채고 픽업했고, ‘공연히’의 편곡 역시 사계절의 리더 신병하에게 맡기게 된다. 

앞서 윤시내의 ‘공연히’가 입상권엔 들지 못했지만 가요제 이후 입상곡 만큼이나 화제를 모았다는 이야기를 증명하는 신문 기사가 있다.


'78 서울국제가요제 본선에 진출, 개성 있는 목소리로 주목을 받은 윤시내양(24)이 서라벌 레코드사와 전속계약, 디스크 가수로 첫발을 내디뎠다. 윤양은 영화 ‘별들의 고향’의 주제가를 불러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를 모았다가 미8군 무대에서만 활동, 일반 가요 팬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서울예고를 졸업한 윤양은 미8군 무대를 통해 가요계에 데뷔한 뒤 사계절 멤버로 활약해왔다. 그런데 4백만원의 전속금을 주고 윤양을 스카우트한 서라벌 레코드사는 하수영, 최백호, 산울림 등 인기가수만을 양성, 배출한 메이커로서 업계에서는 윤양의 스카우트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경향신문 1978년 8월 2일, 윤시내 서라벌로


가요제가 끝난 뒤 한 달 만에 당시로서는 거액의 전속금을 받으며 굴지의 레이블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월 25일 서라벌 레코드를 통해 윤시내의 첫 독집 [윤시내 새노래 모음] (1978, 서라벌, SR-0129)이 발표됐다. 계약과 관련된 기사가 신문에 나고 석 달이 채 되기 전이다.

급하게 제작된 탓인지 음반에는 작곡자 최종혁과 연석원이 기존에 발표됐던 곡도 상당히 많이 수록됐다.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부족하게 들리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 마음 너무도 몰라’는 지연의 [지연 새노래 모음] (1977, 서라벌, SR-0066)에 담겼던 곡이고, ‘사랑의 기도’는 산이슬에서 독립한 주정이가 [주정이 새노래 앨범] (1977, 서라벌, SR-0082)에서 먼저 발표했다. ‘거울’은 윤수일의 [잊지마세요 / 갈대] (1978, 힛트, LA-009)에, ‘아낙네’는 연주곡 위주의 연석원 작품집 [연석원 신곡집 어부] (1978, 서라벌, SR-0093)에 각각 윤시내의 음성으로 실렸던 곡이다. 이 가운데 ‘내 마음 너무도 몰라’와 ‘거울’은 편곡과 연주가 이 음반의 수록 버전과 다르며, ‘사랑의 기도’는 같은 연주에 가수만 다른 반면 ‘아낙네’는 기 발표곡과 동일한 녹음이 담겼다. 물론 음반에서 가장 눈길을 모으는 트랙은 가요제 참가곡인 ‘공연히’와 음반을 위해 새롭게 수록된 ‘난 모르겠네’다. 클라리넷의 가느다란 솔로와 퍼커션이 만들어놓은 인트로의 틀에 가세하는 현악파트의 연주가 이내 펑키한 밴드 스타일의 연주와 조화를 이루는 ‘난 모르겠네’과 이미 가요제를 통해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가사와 멜로디를 선보였던 ‘공연히’는 이 음반의 시선이 앞서 킹박이 언급했던 김추자를 향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음반 발표 이후, 이전에 비해 레코딩 외에 사계절과 윤시내의 활동은 분리되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사계절은 MBC-TV에 고정출연하며 편곡과 연주를 담당했고, 결국 편곡 활동에 바빠진 신병하는 1980년경 사계절을 해체시키게 된다. 윤시내는 최종혁의 피아노 반주로 이대 입구의 살롱 ‘맥스 캐빈’에서 활동하며 계속해서 호흡을 맞췄다. 윤시내의 이후 활동이 ‘난 모르겠네’나 ‘공연히’와 같은 펑키 스타일이 아니고, 윤시내식 트로트 넘버 ‘내 마음 너무도 몰라’나, 슬로우 넘버 ‘사랑의 기도’와 같은 곡에 특유의 가창력을 더한 ‘열애’(1979), ‘고목’(1980), ‘천년’(1980)으로 이어진 것도 어쩌면 이러한 활동에서 만들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윤시내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곡을 꼽으라면 이후 발표된 ‘열애’를 꼽는 게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가며 ‘파격’을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 이 음반에 1970년대 말을 강타한 펑키/디스코의 유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보적 위치를 부여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 가수를 염두에 둔 작곡, 가수의 독특한 개성, 시대를 앞선 편곡과 연주가 맞물린 문제작이다. (20210927)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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