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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MUSIC LIFE/LINER NOTES (DOMESTIC)

로커스트 [사철 메뚜기]

국내 우먼 프론티드 록 밴드의 별종, 로커스트.

대학가요제와 함께 다시 시작된 ‘그룹사운드 붐’

1977년 9월 3일,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MBC 대학가요제 본선에서 서울대학교 캠퍼스 밴드 샌드 페블스의 ‘나 어떡해’가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무대는 TV를 통해 전국으로 중계되어 순식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대학가요제를 모델로 한 ‘강변 축제’, ‘해변 가요제’와 그 후신인 ‘젊은이의 가요제’, ‘대학가요 축제’ 등 유사한 많은 캠퍼스 페스티벌들이 각 방송국에서 앞 다퉈 개최되었다. 그리고 제1회 대학가요제에서 솔로나 중창팀이 아니고 밴드, 소위 ‘그룹사운드’에게 대상이 돌아감으로 인해 이후의 캠퍼스 페스티벌들에서는 예선에서부터 각 대학을 대표하는 밴드들의 각축전이 벌어졌다.

1978년 해변가요제에서는 블랙 테트라 2기(우수상), 런 웨이 10기(인기상), 피버스(인기상), 장남들(장려상), 블루 드래곤 1기(장려상)이 등장했으며, 같은 해 대학가요제에서는 런 웨이 10기가 은상을 받았다. 1979년에는 더 많은 밴드들이 가요제 본선에 올랐다. 해변가요제에서 이어진 제2회 젊은이의 가요제에서는 ‘연’으로 작사상과 우수상을 받은 라이너스 외에도 블랙 테트라 3기가 인기상과 작곡상을 받았다. 또 라스트 포인트와 제브라가 장려상을 받았고, 본상은 받지 못했지만 캐러반, 톱니바퀴, 런 웨이 11기가 본선 무대에 올랐다. 대학가요제 역시 런 웨이 11기, 블루 드래곤 2기, 백마들, 다섯 소리, 샐러멘더스 등 가장 많은 밴드들이 본선에 오르며 소위 ‘대마초 파동’이후 자취를 감췄던 밴드의 시대가 돌아왔음을 알렸다.

1980년 10월 1일자 동아일보 가운데 ‘대학 그룹사운드 붐’이라는 기사를 보면 1980년 젊은이의 가요제에는 밴드만 400여 팀이 출전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기사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한 대학에 1, 2개 팀에 불과하던 캠퍼스 밴드가 당시처럼 늘어난 까닭은 대학가요제 등의 행사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로커스트는 바로 기사에 언급됐듯 400여 팀이 출전했던 예선관문을 뚫고 1980년 제3회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하늘색 꿈’으로 대상을 받은 밴드다.


대학가요제와 젊은이의 가요제의 차이

초기 대학가요제와 젊은이의 가요제(해변가요제 포함)은 유사한 것 같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가요제의 이름에서도 잘 드러난다. 말 그대로 대학가요제는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가요제고, 젊은이의 가요제는 젊은이들이 참여하는 가요제라는 얘기다. 다시 말해서 대학가요제와 달리 젊은이의 가요제는 대학에 다니지 않는 젊은이도 참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 때문인지 대부분 각 학교를 대표하며 기수를 이어 내려오는 전통 있는 밴드들이 참여했던 대학가요제와 달리, 젊은이의 가요제에는 대학 연합 밴드나 대학에 다니지 않는 멤버를 포함한 밴드도 많이 결선에 올랐다. 해변가요제에서 일약 스타밴드로 부각된 블랙 테트라 2기는 흔히 홍익대 캠퍼스 밴드로 알고 있지만, 밴드의 기타리스트 김정선은 홍익대 학생이 아니었다. 또 피버스와 장남들은 고등학생시절 동창들로 결성된 밴드라서 연합밴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대학가요제와 젊은이의 가요제는 이 외에 또 하나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대학가요제는 전국방송인 MBC에서 주최한 행사고, 젊은이의 가요제는 언론 통폐합 이전의 TBC가 주최한 행사였다. 때문에 대학가요제 예선은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 계열사들에서 치러졌고 이후 본선이 서울에서 열린 반면, 젊은이의 가요제는 예선에서 본선까지 모두 서울에서 열렸다. 또 방송 역시도 젊은이의 가요제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일대에만 TBC를 통해 송출됐다. 때문에 대학가요제의 입상곡들이 비교적 빨리 가요 인기순위에 반영됐던 반면 젊은이의 가요제 입상곡들은 가요제 이후 기념음반이 발매되고 그 이후 젊은이들 취향의 방송에 소개된 뒤에야 비로소 주목 받게 됐다. 그나마 이러한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쉽사리 다가가는 건 대학가요제 입상곡에 비해 훨씬 힘들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배출된 곡 가운데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곡은 얼마나 양질의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될 것이다.


1980년 제3회 TBC 젊은이의 가요제 대상곡 ‘하늘색 꿈’

로커스트는 1980년 제3회 TBC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하늘색 꿈’으로 대상을 받은 밴드다. 밴드가 대상을 받은 건 그때까지 해변가요제와 젊은이의 가요제를 통틀어 처음이다. MBC 대학가요제에서도 첫 번째 행사에서 샌드 페블스가 대상을 받은 뒤 밴드가 대상을 받은 건 1988년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가 처음이다. 또 두 방송국의 가요제를 통틀어 여성이 보컬을 맡은 있는 밴드가 대상은 받은 건 유일했다.

가요제가 끝난 뒤 1980년 8월 2일 경향신문에는 “TBC가 마련한 제3회 젊은이의 가요제의 그랑프리(상금 50만원)는 ‘하늘색 꿈’을 부른 로커스트(고대·연대·덕성여대 혼성 5인조)가 차지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또 가요제 이후 발간된 작은 노래책들에는 보컬리스트 김태민의 사진과 함께 ‘하늘거리는’ 율동으로 많은 젊은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로커스트의 무대에 대한 설명이 실렸다.


대상의 인기를 앞지른 금상곡 옥슨 80의 ‘불놀이야’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서울과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의 경우, 그 실체를 알게 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대신 대상을 받은 로커스트보다 독특한 개성의 펑크(funk)사운드와 재미있는 가사와 위트 넘친 무대 매너를 가진 옥슨 80이 더욱 빠르게 인기를 모아 나갔다. 옥슨 80는 같은 해 ‘불놀이야’로 금상을 받았다. 옥슨 80이 먼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건 비록 가요제 실황은 전국에 방송되지 못했지만, 전국방송인 MBC-TV ‘영 11’을 비롯해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들에서 기존 가요제 수상 밴드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을 각인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기는 이듬해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가요 인기순위에 확실하게 반영됐다.

당시 KBS-2TV가 1981년 4월 23일, ‘5천만의 노래’ 프로그램을 위해 서울시내 경기·서문·풍문·예일여고 등 2학년 여고생 4백 명을 상대로 조사한 가요 인기 베스트 10의 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그대여 (이정희) 
② 바보 (윤형주) 
③ 사랑이여 (유심초) 
④ 옛 시인의 노래 (한경애) 
⑤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김창완) 
⑥ 행복한 사람 (조동진) 
⑦ 꿈의 대화 (이범용·한명훈) 
⑧ 사랑스런 그대 (윤형주) 
⑨ 불놀이야 (옥슨 80) 
⑩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양희은)

차트 상에는 대학가요제를 비롯해서 그와 유사한 가요제를 통해 배출된 뮤지션이 셋 보인다. 우선 1위를 차지한 ‘그대여’는 대학가요경연대회에서 ‘그대 생각’으로 대상을 차지한 이정희가 ‘바야야’의 히트에 이어 발표한 후속곡이다. 이 외에는 MBC 대학가요제 대상곡 ‘꿈의 대화’가 있고, TBC 젊은이의 가요제 금상곡 ‘불놀이야’가 뽑혔다. 역시 같은 프로그램에서 대학생이 뽑은 차트를 살펴보자.

① 사랑이여 (유심초)
② 그대여 (이정희)
③ 행복한 사람 (조동진)
④ 불놀이야 (옥슨 80)
⑤ 사랑하는 사람아 (조진원·홍종임)
⑥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유심초)
⑦ 창문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김창완) 

대학생들이 뽑은 차트에는 다시 ‘꿈의 대화’가 빠지고 사랑의 듀엣 쇼 입상곡 ‘사랑하는 사람아’가 올랐다. 그리고 이 차트에도 젊은이의 가요제에서는 대상을 받았던 로커스트의 ‘하늘색 꿈’이 아니고 옥슨 80의 ‘불놀이야’가 올랐다. 매스컴을 통한 꾸준한 노출과 첫 귀에 쏙 들어오는 충격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옥슨 80에 비해 로커스트는 그렇게 방송을 많이 타지 않았다. 하지만 인상적인 멜로디와 곡의 완성도는 꾸준하고 지속적인 인기를 보장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박지윤이 자신의 정규 1집에서 리메이크하며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독이 되어 돌아온 박지윤의 ‘하늘색 꿈’

박지윤이 다시 부른 ‘하늘색 꿈’은 데뷔곡임에도 불구하고 모델과 탤런트로 활동했던 그녀의 인기를 타고 곧바로 인기곡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 인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의외의 결과을 잉태했다. ‘하늘색 꿈’의 작곡가인 조영수가 음반제작자들이 박지윤의 앨범 제작 과정에서 1980년 당시 ‘하늘색 꿈’의 작사·편곡을 맡았던 최광수(라이너스의 멤버)로부터 곡의 사용 승낙을 받은 뒤 리메이크해 수록하자, 가처분신청과 함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결국 박지윤의 ‘하늘색 꿈’은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서울고법 민사4부는 2일 인기가수 박지윤양(17)의 히트곡 ‘하늘색 꿈’이 작곡자의 허가 없이 개작돼 저작권을 침해당했다며 조모씨가 (주)서울음반 등을 상대로 낸 판매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이 노래가 수록된 음반은 제조, 판매, 배포가 금지된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하늘색 꿈’은 80년 젊은이의 가요제 대상곡인 그룹 로커스트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이라며 “그러나 당시 이 곡은 조씨가 작곡한 ‘꿈의 세계’라는 노래의 전반부 26마디를 그대로 살리고 후렴부분만 추가했으며 출품 당시 작곡자도 조씨로 돼 있었던 점이 인정 된다”고 밝혔다. 
- 경향신문 1999년 7월 3일, 가수 박지윤 ‘하늘색 꿈’ 판금, ‘작곡자 허가 없이 리메이크’


그리고 2004년 4월, 작곡가 조영수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 맺었던 저작권 신탁계약을 해지하며 노래방 반주, 휴대전화 벨소리 등에서도 이 곡이 사라졌다. 2004년 7080 밴드 붐을 타고 다시 활동을 시작한 로커스트의 김태민이 무대에서 ‘하늘색 꿈’을 부르지 못하게 된 것, 방송에서도 들을 수 없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리메이크와 함께 찾아온 새로운 관심이 오히려 곡에는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로커스트의 독집에 대해 살펴보자.


대성음반의 2호 음반 로커스트 독집

성음사의 사장으로 있던 이흥주는 대성음반이라는 새로운 레이블을 만들었다. 그리고 성음사 시절 두각을 나타냈던 산울림의 김창완은 대성음반의 설립과 함께 입사했다. 1981년 11월 5일 동아일보 ‘대학가 그룹사운드 홍수’라는 기사를 살펴보면 “젊은이 취향의 노래를 많이 레코딩하는 대성음향의 이흥주 사장”이라는 표현과 함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이렇게 대성음반이 젊은이 취향의 노래를 많이 레코딩하는 레이블이라고 알려지게 된 데는 김창완의 선구안이 큰 역할을 했다. 로커스트는 그 가운데 첫 번째로 대성음반에 발탁된 밴드다. 로커스트의 유일한 독집은 제대한 두 동생과 다시 밴드를 추슬러 발표한 [산울림 7집]에 이어 대성음반의 상표를 달고 나온 두 번째 음반이다.

대성음반은 로커스트 이후 1981년 제5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잊고 산 것’으로 금상을 받은 한인희가 인희로 개명하고 발표한 독집 [다이너마이트 소녀](1982, 대성음반, DAS-0051), 1983년 제7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한우리’로 동상을 받은 어금니와 송곳니의 [춤추는 밤 / 초능력](1984, 대성음반, DAS-0162)을 비롯해, 해변가요제 출신으로 노만 기획에서 두 장의 독집을 발표한 후 일시적으로 흩어졌다가 재결성된 벗님들의 3집 [벗님들 '84](1984, 대성음반, DAS-0184), 충남대 백마들이 독립한 북극성의 [이별시 / 어느 날 아침 / 하얀 미소](1986, 대성음반, DAS-0356)와 같은 음반으로 계속해서 캠퍼스 페스티벌 출신 밴드들과 인연을 맺었다. 뮤지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중적인 인기보다 독특함과 실험성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산울림의 김창완이 작곡과 프로듀스를 맡아

앞서 언급한 동아일보 기사 ‘대학가 그룹사운드 홍수’에는 “대학생 그룹사운드가 젊은 지성에 어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작곡이나 편곡에서 서투른 점은 많아. 또 표현능력이 모자라 동료대학생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아 아쉬울 때는 외국 그룹사운드의 음악을 연주하기도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로커스트의 음반 수록곡에는 밴드의 자작곡이 없다. 대부분 산울림의 김창완이 작곡한 곡이고, 이현희와 조진원의 곡이 수록됐다. 앞선 기사와 비교해보자면 작곡과 편곡의 서툰 점은 김창완이 개입하며 해결됐고, 표현 능력은 이미 젊은이의 가요제를 통해 증명된 부분이었다. 이렇게 유기적으로 맞물린 좋은 흐름은 음반에 그대로 담겼다. 김창완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희의 음반이나 어금니와 송곳니의 음반처럼 뮤지션의 개성이 김창완의 그것에 잠식당하지 않고 시너지 효과를 만들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하지만 로커스트의 음반은 ‘내가 말했잖아’의 히트에도 불구하고 발매 당시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오히려 이후 일반 가요를 즐겨듣는 층 보다는 일부 프로그레시브록 마니아들로부터 먼저 사랑을 받았다. 또 국내 마니아들의 컬렉팅 대상으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고, 외국의 값비싼 프로그레시브 록 음반들과의 교환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희소성을 찾는 그들의 버릇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들의 음반이 구하기 어려운 ‘희귀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들의 음반이 충분한 기량을 갖추고 일관적인 흐름을 만들어낸 하나의 ‘작품’이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내용이다.

작곡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이현희(음반에는 이연희로 표기)가 작곡한 ‘내가 말했잖아’는 상큼한 복고풍의 로큰롤 넘버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던 곡이다. 동아일보 1982년 2월 8일 기사 ‘인기가요 지방서 먼저 히트한다’는 기사를 보면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지에서 1981년부터 붐을 일으킨 후 서울에 상륙한 노래 가운데 이 곡을 꼽았다. 앞서 언급했던 젊은이의 가요제 대상곡 ‘하늘색 꿈’과는 반대의 현상이다. 이현희는 이후 현희라는 이름으로 김창완이 구성한 또 하나의 프로젝트 꾸러기에 참여하게 된다. 

로커스트의 음악적인 특징 중 하나는 보컬을 맡은 김태민의 목소리다. 여린 가성과 강력한 샤우팅을 오가는 그녀의 목소리는 곡마다 다른 느낌으로 들리는 일종의 ‘표정’이 있다. 대부분의 수록곡에서 이러한 경향이 드러나지만 특히 ‘저 달이 미워’과 ‘밤 길’는 주목할 만하다. 당시 까지 국내의 그룹에 있어서의 여성 보컬의 존재가 보여줬던 ‘밴드+1’이라는 자리를 벗어나서 그룹의 일원으로 그룹의 색깔의 규정짓는 역할을 한 소중한 트랙들이다. ‘오늘 같이 이상한 날’은 이후 산울림의 8집 음반에 다시 수록되어 비교 감상의 재미를 주는 곡. 

돌아보면 로커스트는 젊은이의 가요제에 등장할 당시부터 별종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캠퍼스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수상한 유일한 우먼 프론티드 록 밴드란 점도 그렇고,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 국내에서 활동하며 사랑받았던 우먼 프론티드 밴드들의 음악 스타일이 ‘트로트 고고’의 틀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려도 마찬가지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 ‘사철 메뚜기’라는 그룹 이름을 택했다는 그들의 소망. 유일한 독집 음반 발매로부터 35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도 유효하게 이어지고 있다. 비록 그 활동 기간은 ‘한 철’ 밖에는 되지 못했지만. (20160411)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


발매된 음반에 동봉된 라이너노트에는 최규성 선배 글과 함께 담겼다. 그래서 분량이 넘쳐서인지 원래 썼던 글과는 조금 다르다. 요 원고가 원래 발송했던 라이너노트 원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