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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MUSIC LIFE/MUSIC LIFE

대전, 그 때는... (1)

이 글은 어떤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내 기억과 당시 생각에 의존한 내용이기 때문에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내가 방송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87년이다. 당시 대전 MBC-FM의 간판 프로그램이었던 ‘권희정의 팝스 퍼레이드’에 게스트로 출연하게 됐는데, 매주 출연은 아니고 나(충남대 아마추어 디제이 클럽), 김소영(한남대 오선회), 신윤철(대전대 소리방)이 돌아가면서 나갔다. 한 번에 세 곡씩 소개했던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시 제작 담당은 이태기 PD였다. 이태기 PD는 각 대학의 음악감상 동아리에 관심이 많았다. 자연스레 이태기 PD를 중심으로 3개 대학 연합 동아리인 MOT(Music Over Three)가 만들어져 대학 동아리끼리 교류를 가졌고, 음악 감상회도 주최했다. 이태기 PD는 우리 고민도 잘 받아줬고, 밥(술)도 자주 사줬다. 참 고마운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난 뒤 우리 동아리 선배 중에 제일 예쁜 4학년 선배인 박미영 누나와 결혼에 골인했다. “아... 그래서...”라고 많은 퍼즐이 맞아 떨어졌다;

이태기 PD는 ‘팝스 퍼레이드’ 외에도 인기 프로그램 ‘젊음이 있는 곳에’와 주말 프로그램인 ‘오픈 스튜디오’를 제작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내가 한 번씩 가서 봤던 대전 MBC는 ‘물갈이(?)’가 되던 시기였다. ‘젊음이 있는 곳에’는 스타 진행자들을 배출했다. 김준모(현재 TBN ‘출발 대전 대행진’), 김주홍(현재 대전 MBC ‘즐거운 오후 2시’), 이창명(“짜장면 시키신 분~”) 그리고 오픈 스튜디오의 진행자 주연민... 프로듀서부터 주축 진행자들까지 모두 젊고 새로웠다. 이 시기 전까지 대전 MBC의 간판 라디오 프로그램 가운데는 라디오를 들으며 문제를 풀어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독특한 형식의 ‘라디엔티어링’이 있었다. 라디엔티어링은 충남대 출신 대표 개그맨 겸 MC 임종식을 스타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방송국에 다니던 시기는 이미 중심이 된 임종식 시대에서 이태기 시대로 넘어가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주연민의 이름은 오준영과 사냥꾼들의 음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환이는 나중에 오픈스튜디오에 자신의 밴드와 함께 출연해서, 당시 서울에서 내려온 안회태와 한 판 기타 배틀을 펼치기도(?) 했다.

 

오준영과 사냥꾼들

[멤버] 오준영 이성열 안영만 장재현 주연민 장철호 [수록곡] 그대 떠난뒤 (노래 오준영과 사냥꾼들, 작사 오준영, 작곡 오준영) | 나팔수 (노래 오준영, 작사 장지은, 작곡 오준영) | 당신 생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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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기 PD와의 인연으로 우리 동아리 충남대 아마추어 클럽도 ‘오픈 스튜디오’에 출연했다. 당시 진행자는 앞서 이야기했던 주연민이다. 당시 게스트 뮤지션 신윤식 형님과의 인연은 페이스북으로 이어져 얼마 전 형님이 보내주신 카세트테이프 몇 개를 고맙게 받았다. 주연민은 아카데미 극장 쪽에 있던 오비캠프의 매니저를 겸했다. 당시 오비캠프 무대에는 김지연이 고정적으로 공연했다. 호프집에서는 김지연, 지금 으능정이 거리에 있던 엘브즈 음악 감상실에서는 신승훈, 그리고 중앙데파트와 유성의 나이트클럽에서는 심신이 활약하던 시기였다.

내 기억으로 호프집에서는 충남대 팝스우리보다 한남대 샤프렛의 활동이 도드라졌다. 지금 생각하면 어떤 커넥션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막연하게 그 중심에는 권태봉이 있었을 거라 추측하고 있다. 권태봉은 한남대 출신은 아니지만 대학가요제 입상 이후 한남대와 교류를 계속 이어갔다. 물론 그 뒤는 이재성이고. 샤프렛 출신 나영동은 당시로서는 힘들었던 독집 음반도 발표했다(영동이형은 나중에 컨템포러리를 운영했다. 지금 쌍리 사장님의 동생이다). 영동이형에게 당시 음반 제작 과정과 샤프렛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보고 대답을 들었는데, 그 날 함께 술을 너무 먹어서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ㅠ)

 

모든 게 내 잘못이야 / 마음의 사치

[수록곡] 마음의 사치 (노래 나영동, 작사 송시현, 작곡 송시현) | 그대속에 가득한 아픔 (노래 나영동, 작사 송주현, 작곡 송주현) | 모든게 내 잘못이야 (노래 나영동, 작사 김민정, 작곡 송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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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충남대에서 열린 백마가요제에서 부활의 ‘희야’를 불러 일약 교내 스타가 된 신승훈이 노래하던 엘브즈 음악 감상실 이전부터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은 유명했다. 당시 대전의 핫 스페이스는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였다. 약속은 언제나 ‘홍분다실(홍명상가 분수대)’ 혹은 ‘중전다실(중앙데파트 앞 광장)’이었다.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은 홍명상가에 있었고, 중앙데파트 쪽엔 이후에 생긴 파이오니아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이곳에선 스타 디제이들이 배출됐는데, 최평근(현재 전기줄 위의 참새), 김현철(이후 KBS-FM), 이종원이 대표적이었다. 다시 방송국 얘기로 잠깐 돌아가 보면 앞서 대전 MBC가 젊은 인물로 바뀌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래도 대장은 백담 부장이었다. 방송국에서 몇 번 마주친 모습은 그야말로 대단한 포스 그 자체였다. 언젠가 유현상 형님에게 백담 부장 이야기를 잠시 꺼낸 적이 있는데, 그 앞에서는 쩔쩔 맸다고 이야기했다. 천하의 유현상 형님이 설설 길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 바로 백담 부장이다. 에피소드도 몇 개 이야기했지만, 여기에 밝힐 수가 없어서;;;

여튼 유성의 나이트클럽 출연 뮤지션과 방송국과의 커넥션은 백담 부장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이와는 별개로 젊은 뮤지션과의 새로운 관계 역시 만들어 갔다. 신탄진 출신 그룹 진의 음반 뒷면에서 이 커넥션을 확인할 수 있고, 이 외에도 음반의 크레디트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런 게 세상이야

[앨범 소개말] 우리가 어렵고 방황할때 힘과 용기를 주신 대전문화 방송 "젊음이 있는 곳에" 스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 사드립니다. 특히 상업성 음악이 난무하는 지금 그룹 음악이 나가 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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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 팝스우리는 신승훈이라는 스타를 배출했지만, 실제적인 동아리 활동은 앞서 이야기했듯 한남대 샤프렛이 더 눈에 띄었다. 오히려 내가 제대한 다음에는 아마추어 디제이클럽 선배인 환용이형이 만든 개그 동아리 입큰개그리에도 밀렸다고 생각됐다. 충남대는 팝스우리보다 백마들의 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마들에서 관심 있게 살펴볼 인물은 이예섭과 김낙돈이다. 이예섭은 초기 백마들의 자작곡 넘버를 만든 인물이고 김낙돈은 뛰어난 기타리스트였다. 예전에 국환이에게 대전을 대표할 기타리스트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주저하지 않고 김낙돈의 이름을 댔다. 김낙돈이 있던 백마들은 김창완의 꾸러기를 잇는 새로운 꾸러기를 만들려던 대성음반에 발탁되어 ‘꾸러기들 북극성’이라는 음반을 한 장 발매했는데, 이 기획은 힘없이 실패하고 꾸러기의 계보는 동물원->이야기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김낙돈은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조용필을 비롯한 이시영 등의 음반 크레디트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게 된다(이상하게 북극성 음반이 네이버나 매니아디비에 없어서 사진을 직접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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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 백마들 출신 꾸러기들 북극성의 유일한 앨범.

 

 

14집 슬픈 베아트리체

조용필이 1992년 발매한 14집 음반으로 그가 전곡을 작곡했다. <슬픈 베아트리체>는 최고 히트하였고 2017년 「팬텀싱어」에까지 소개됐다. 조용필이 어머니를 여의고 만든 <고독한 runner>는 마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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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정리도 안 되고 두서없이 이어져;;; 나머지 이야기는 좀 더 생각해서 이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