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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PRIVATE LIFE/BOOKSHELF

박소연의 ‘꽃 그림자 놀이’

<꽃 그림자 놀이>는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박소연의 장편소설로, 소설이 금지되었던 조선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전해 실제 전해 내려오는 민담과 그렇지 않은 짧은 에피소드가 독립적으로 삽입된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구성이 예전에 읽었던 몇몇 소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몰입을 방해했다. 이 짧은 소설 속 소설이 전체적인 진행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생각하며 읽었던 앞선 내용을 복기하느라 한 호흡에 읽어 내려가는 게 무리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생각하니 큰 연관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도 많았다.

책 제목인 ‘꽃 그림자 놀이’는 ‘소설’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아니지만 다산(茶山) 정약용이 밤마다 꽃 그림자를 위해 담장 벽을 깨끗하게 쓸고 등잔불을 켠 다음, 그 가운데 쓸쓸히 앉아 홀로 즐기곤 한다는 이야기는 그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1집 13권 ‘국영시서(菊影詩序)’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그리고 때론 혼자가 아니라 주안상을 마주한 친한 선비들과 국화꽃 그림자를 보며 서로 취해 시를 읊는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전략) 소설은 일종의 그림자놀이예요. 현실이 실체를 드러낼 수 없으니, 대신 그림자로 보여주는 거지요.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림자는 실체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아요. 이 손으로 토끼도 되었다 여우도 되었다 하잖아요? 이런 묘미가 나를 소설로 이끌었나봐요.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비추면서도, 때로는 의도하지 않았던 그림자만의 재미있는 세계가 펼쳐지니 말이에요. (후략)

 


비단 소설뿐 아니라 음악에도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소설이 그런 것처럼 우리는 음악으로 직접 체험하지 못하는 일의 주인공이 되어 대리만족을 취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힘들지만 섣불리 내색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음악은 가수가 부르는 노래, 혹은 연주자가 연주하는 음악이 아니라 나 혼자 되뇌는 혼잣말이 된다. 그리고 이런 각자의 혼잣말은 빛이 비치는 방향, 또 그걸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이 투사되는 수만 가지의 그림자가 될 것이다.

 

(전략) 사형수는 잠들어 있었다. 목련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여인의 얼굴엔 꽃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광대는 달빛이 구름 뒤에 숨는 틈을 타 날렵하게 목련나무 뒤로 몸을 붙였다. 죄인은 입을 벌린 채 가늘게 앓는 소리를 냈다. 광대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때 후드득 목련 꽃잎이 떨어졌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뒤척였다. 광대는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후략)

 


동양이나 서양이나 광대와 달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듯하다.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달에 홀린 피에로’에서 밴드명을 착안한 이탈리아의 아방가르드/프로그레시브록 밴드 삐에로 뤼네르(Pierrot Lunaire)가 잔뜩 짓이겨 놓은 ‘사랑의 송가(Plaisir d'Amour)’. 소설 속 마지막 소설에 등장하는 광대와 사형수의 사랑이 이런 느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