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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PRIVATE LIFE/BOOKSHELF

구효서의 ‘빵 좋아하세요?: 단팥빵과 모란’

싫어하진 않지만, 썩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아요.”

아마도 누군가 책 제목처럼 나한테 물어본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거 같다. 또 하드커버 양장제본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가방에 넣어 다니며 읽는 경우가 많은데, 꺼내 읽기도 불편하고 무겁다. 몇 가지 버전이 있다면 그냥 일반적인 제본을 선택한다. 물론 가격도 싸다. 그런데 구효서의 <빵 좋아하세요?: 단팥빵과 모란>은 이상하게 손이 갔다. 아트워크의 일러스트 때문인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빵을 좋아하게 되었던 건지, 어쨌든 뭔가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소설은 폐암 치료를 중단하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엄마(김경희)가 불쑥 죽기 전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단팥빵을 먹어야겠다는 이야기를 딸 미르에게 하며, 미국에서 28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일종의 단팥빵 순례를 하는 걸로 진행된다. 엄마의 기억에 존재하는 최고의 단팥빵을 찾기 위해 모녀는 분당, 당진, 대구, 부산, 원주 등 이름난 단팥빵을 찾아 여행한다. 그 일정 가운데 첫 도시는 대전이다. 소설 가운데 상호가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누구나 머리에 떠오를 성심당도 잠깐 언급된다. 하지만 대전 토박이로 이야기하자면 성심당이 대전을 대표하는 빵집으로 인식된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예전 대전에는 중앙시장 근처의 프론네제과, 태극당, 대전역 맞은편 탤런트 전양자가 차린 에펠제과, 성심당과 맞은편의 봉봉제과 등 흔히 구도심으로 불리는 지역에 많은 빵집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당시 중고등학생이 미팅하는 곳도 이런 빵집이었다. 잘 나가던 태극당은 1985년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주문한 크림빵이 집단 식중독을 일으키는 바람에 간판을 내리게 되고, 나머지 빵집들도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성심당은 굴곡이 있었지만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고, 지금의 명성을 누리게 됐다. 어렸을 땐 아빠가 성심당에서 사 오신 게 주로 상투과자나 밤만주, 전병 종류였기 때문에 빵을 파는 곳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소설에서 모녀가 처음 찾은 곳은 성심당이 아니고 다른 곳이었다. 은행동 23-6번지라는 주소만 가지고 찾아간 빵집은 한복집이 되어 있다고 나오고, 주변 커피숍에 물어봐도 어디로 옮겼는지 모른다고 했다. 대신 튀김소보로가 유명한 빵집을 소개한다. 누구나 생각하는 그곳일 것이다. 잠시 시내 나갔다가 주소를 찾아가 봤다. 내 기억으로도 그 자리엔 빵집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어렸을 때 거긴 내가 다니던 동네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언급된 커피숍도 가봤다. 책엔 상호를 직접 언급하기 힘들어서였는지 오타인지 ‘ANDORH-OFFEE’라고 나와 있지만 사실은 안도르 커피다. 설명대로 일제강점기 대전 부윤의 관사를 리모델링한 커피숍이다.

 

은행동 23-6번지
커피숍 안도르
추석 휴일에도 엄청난 줄이 늘어서 있던 성심당

목포의 나무개제과점을 찾아간 모녀는 전설의 단팥빵을 만들다 은둔한 제빵사 우당을 기다리기 위해 아예 게스트하우스에 머문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목포에 나무개제과점이라는 빵집은 없다. 대신 책에 언급된 주소(영산로75번길)를 보면 거의 코롬방제과점과 일치한다. 목포역 바로 앞에 있는 코롬방제과점은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제과점이고 1949, 코롬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개업했다고 한다. 이렇게 초기 소설의 진행만 보면 마치 무협지 가운데 소위 간판을 떼려유랑하는 무사나,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의 장인을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전체적인 내용은 사람과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결론을 도출하는 복선을 여기저기 깔아뒀지만, 다른 이야기에 몰두하느라 놓치고 책의 중반부를 조금 지나서야 등장인물의 관계를 알게 된 건 좀 억울하다. 전체적으로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하기까진 뭐하지만, 모난 구석 없이 잔잔하고 평온하다. 책을 읽은 뒤엔 누구나 나처럼 단팥빵을 먹고 싶어질 것 같다. 그리고 책을 읽은 뒤 먹는 단팥빵은 지극히 흔하고 평범하지만 분명 이전에 먹던 것과는 다른 맛이리라.

 

(전략) 호밀빵 할머니의 집 뜨락에는 해마다 5월이면 탐스럽게 피어나는 모란이 몇 그루 있었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할머니가 물었다.
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모란이 피어 있는 건 고작 닷새뿐이라는 얘기야. 삼백예순다섯 발 빼기 삼백예순 날이면 닷새. 그것도 한 송이로 치자면 딱 사흘뿐이야. 진짜. 사흘. 그리곤 뚝뚝 떨어진다고. 뚝뚝. 그 큰 것이 말이야. 아휴. 모란이 아름다운 건 그 때문이야. 지고 나면 삼백예순 날을 기다려야 해서. 긴 기다림이 있어서 더 아름다워지는 거지. 그런데 모란이 진짜로 아름다울 때는 언제인 줄 알아?” (후략)

 

호밀빵 할머니가 미르와의 대화에 인용한 문구는 시인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고등학교 땐가 수업 시간에도 배운 것 같은데. 어쨌든, 이 시가 낭송되는 노래도 있다. 바로 1979년 제3MBC 대학가요제에 전남 대표로 출전했던 김종률, 정권수, 박미희 트리오의 영랑과 강진이다. 은상을 받았던 영랑과 강진은 종종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었지만, 곧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게 된다.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자라고 시작하는 가사가 북한의 남침을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화지만, 그땐 그런 시대였다. 김종률은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