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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PRIVATE LIFE/BOOKSHELF

모리사와 아키오의 ‘무지개 곶의 찻집’

살아오면서 취향도 조금씩 바뀐다. 언제부턴가 불편한 영화나 드라마가 싫어졌다. 아무리 인기가 있고 대단한 상을 받았다고 해도 부담되는 구석이 있으면 보지 않게 됐다. 이성은 물론 돈이나 권력을 위한 대립과 권모술수가 난립하는 이야기, 혹은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 등 어쩌면 이야기의 필수 요소가 될 수 있겠지만, 그 상황들은 오히려 영화나 드라마에 끝까지 몰입하기에 너무나 힘든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보니 소설 역시 마찬가지가 됐다. 물론 누군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악인(惡人)이 주요 배역에 포진된 이야기는 점점 손에서 멀어진다. 물론 이 취향도 조만간 바뀌겠지만.

 

모리사와 아키오의 <무지개 곶의 찻집>은 전체적으로 잔잔하다. 6개의 장으로 구성된 목차는 봄에서 봄까지 5번의 계절과 몇 해가 지난 뒤 여름으로 배치되었고, 각 장은 단독적인 이야기지만 전체적으로 연결되는 모자이크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각 장마다 한 곡의 노래가 부제처럼 붙어있다. 예를 들어 1장 봄, 어메이징 그레이스’, ‘2장 여름, 걸즈 온 더 비치. 이런 식이다. 당연하겠지만 부제에 해당하는 노래는 이야기의 중요한 소재가 된다. 소설은 일본 치바 현의 한적한 시골 마을 해안 절벽 끝에 있는 조그만 찻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긴 터널을 지나 간판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찻집을 홀로 운영하는 에쓰코는 이곳을 찾는 손님에게 맛있는 커피와 그 손님에게 가장 맞는 음악을 선사한다. 찻집에 오는 손님은 모두가 어딘가 허전한 구석을 가지고 있지만 에쓰코가 준비한 커피와 음악으로 삶의 위안을 찾고 잃어버렸던 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마치 약사가 약을 처방하듯 음악으로 누군가를 치유하는 장면은 언뜻 레이철 조이스의 소설 <뮤직숍>의 주인공 프랭크를 떠오르게 만들기도 한다. <무지개 곶의 찻집>은 에쓰코와 손님 사이의 이야기를 넘어 손님과 손님 사이의 관계로 발전되며 자정과 치유의 과정이 된다.

 

(전략)
“망설여질 때 로큰롤처럼 살기로 하면 인생이 재미있어지지.”
“로큰롤?”
네모나고 투박한 턱을 박박 긁으며 고지 씨가 말을 잇는다.
“늘 자신을 설레게 하는 쪽으로 가는 거야.”
나는 뭔가 할 말을 찾으려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말이야. 사람이란 뜻밖에 잘 쓰러지지 않거든. 열심히 하기만 하면 절실히 필요할 때 반드시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지.”
(후략)

 

2, 여름 중 에쓰코의 조카 고지와 취업 준비생 이마겐(이마이즈미 겐)의 대화 가운데 한 부분이다. 앞서 판타지라고 할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누가 읽더라도 너무나 낙천적인 이야기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오히려 현실이 아니라 소설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소설에서까지 숨 막히는 현실을 대면하는 건 너무 각박하지 않은가 말이다. 어쨌든 커피와 대화, 그림 그리고 음악과 같이 소소하고 일상적인 소재는 계속해서 소설에서 등장인물을 따뜻하게 감싼다. 아내 사에코의 장례를 치른 뒤 어린 딸 노조미가 보고 싶어 하는 무지개를 따라 무작정 운전대를 잡은 젊은 남편은 음악을 틀어달라는 딸의 이야기에 카 오디오를 켠다.

 

(전략)
나는 카 오디오에 들어 있던 CD를 그대로 재생시켰다. 곧바로 스피커에서 듣기 좋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트윈기타의 산뜻한 전주…….
사에코가 좋아했던 스피츠(Spitz)의 ‘봄의 노래(春の歌)’라는 곡이다. 밝은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노래의 전주를 들으면서, 나는 내 심장 소리가 리듬을 잃고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사에코가 이 차에서 마지막으로 들었을 음악, 분명히 이 CD였을 것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가사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곧 내 귀를 의심했다. 놀랍게도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그야말로 지금의 나를 위한 ‘응원가’ 같았다. 특히 2절은 가슴이 미어질 정도였다.
‘혹시 사에코가 이 세상에 남겨질 나를 위해 이 CD를 넣어둔 게 아닐까?’
(후략)

 

 

지난주엔 엄인호 형님과 약속이 있어 연남동에 갔다. 소위 연트럴 파크엔 찾아온 봄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시간이 잠시 남아 햇볕 잘 드는 곳에서 읽던 책을 펼쳤는데, 책갈피가 마침 5장 봄, 땡큐 포 더 뮤직을 읽을 차례인 걸 알려주고 있었다.

 

봄, 음악 듣기 좋은 계절이다.

 

 

...
그래서 말하는데요, 음악에 감사해요.

내가 부르는 노래에 감사해요.
노래가 가져다주는 모든 기쁨에 감사해요.
어느 누가 노래 없이 살 수 있겠어요? 진심으로 물어보죠.
인생이 어떻게 되겠어요?
노래나 춤이 없다면 우린 뭔가요?
그러니 음악에 감사해요.
음악을 내게 준 데 대해서.
...

Thank You For The Music / AB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