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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PRIVATE LIFE/PRIVATE LIFE

사무실 이사와 리셋 증후군

군 생활 32개월을 제외한다면 한번도 대전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서울에서 가장 많이 가 본 곳이 바로 홍대 근처에 있는 핫뮤직 사무실이다. 원래 길눈이 어둡고 지리에 대한 감각이 무디지만, 이제 전철역에 내려서 사무실까지는 헤매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3년이 조금 넘는 시간에 의해 길들여진 것이다. 주변의 식당 아주머니들께도 이제 눈치보지 않고 점심시간에 공기 밥 한 공기쯤은 얻어먹을 만큼 어색한 느낌이 없어질 즈음, 또 한번 모든 것이 생소한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필수품으로 보급되고, 전화를 사용하는 시간보다 인터넷에 매달리는 시간이 많은 요즘. ‘리셋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어지럽게 흩어진 컴퓨터의 모니터 화면, 어떤 키를 눌러도 말을 듣지 않는 키보드와 마우스... 그럴 때 컴퓨터를 처음 켤 때 상태로 만들기 위해 누르는 게 리셋 버튼이다. 삶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자꾸 ‘꼬여’만 갈 때, 마치 컴퓨터의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현실 세계에서도 ‘리셋’이 가능할 것으로 착각하는 현상을 바로 리셋 증후군이라고 한다.
그다지 비슷한 상황은 아니지만, 사무실의 이사와 함께 떠오른 생각은 바로 리셋 증후군이다. 언제부턴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가다 못해 발 밑에까지 자리했던 CD와 책, 또 여러 자료들. 입사한 지 얼마 안되 검디검은 탁자의 색깔을 참다못해 연두색 시트지를 바르고, 냉장고를 칠하고 있던 검은 페인트를 벗겨내고... 담뱃진으로 얼룩진 에어컨의 때를 지우던 때가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벌써 더렵혀진 테이블 위에는 치열한 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빈 콜라병과 컵라면 용기가 돌아다니고, 냉장고와 에어컨도 며칠 밤을 사무실에서 야근하며 닦지 못한 기자의 이빨과 같은 누런 색을 드러내고 있다.
며칠 후 이사할 건물의 사진을 교정지를 통해 봤다. 지금 생활하는 사무실과는 비교도 하지 못할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 책상이나 다른 집기들도 모두 갖춰져 있다고 하니, 앞서 이야기한 리셋 증후군이란 이야기가 떠오른 것도 어쩌면 당연한 듯 하다. 언젠가 이곳 지면을 통해 한번 썼던 이야기 같지만, 지나간 추억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마찬가지로 이제 기억의 한쪽 구석으로 자리잡게 될 홍대 앞 핫뮤직 사무실 역시도 지금 생각해 보니 온통 아름답고 흐뭇한 기억들뿐이다.

리셋은 분명 리셋일 뿐, 분명 포맷의 의미와는 다르다. 흐뭇한 추억을 뒤로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핫뮤직의 역사 속에서 또 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비록 어린 시절, 새 신발을 사서 머리맡에 올려놓고 누워 뜬눈으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던 그 때와 같은 두근거림은 이제 없지만 말이다.

(월간 핫뮤직 2007년 7월호 편집후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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