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위 제2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예광탄
1986년, 금빛 날개를 형상화한 밴드 로고로 등장해 길지 않았던 한국 헤비메탈의 황금기를 견인했던 시나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날개는 1990년 네 번째 앨범을 마지막으로 꺾이게 된다. 강렬한 타이포그래피로 ‘Heavy Metal’이란 단어를 재킷에 그려 넣으며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해 이후 국내 헤비메탈의 최전방에서 흐름을 진두지휘했고 음악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되는 많은 멤버를 배출했지만, 계속되는 내부 사정을 봉합해가며 변화하는 음악 신에 헤비메탈이라는 음악으로 밴드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시나위는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되고, 리더 신대철은 이듬해인 1991년에 블루스/하드록 밴드 자유를 결성했다. 하지만 자유 역시 한 장의 앨범 외에 별다른 활동 없이 와해됐다. 그리고 신대철은 일반 가수의 음반에 작곡과 연주, 프로듀서의 크레디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며 시나위라는 밴드는 그의 이전 이력 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 채 빠르게 잊혀갔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신대철이 관여한 앨범은 시나위 보컬 출신 임재범의 솔로앨범에서부터 지평권, 서태지와 아이들, 박광현, 이현우, 정해연, 에인절 아이스, 장현철 등 그의 표현에 의하면 ‘닥치는 대로’ 장르에 관계없이 다양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것저것 세션을 많이 하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연주해놓고 내가 (연주했는지)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게. 아, 이것은 나의 길이 아닌가보다 그 순간에 딱 그냥 그날부터 안했어요.”(MBC 스페셜 2011년 7월 8일 ‘나는 록의 전설이다’ 중) 물론 이후에도 이소라, 이선희, 도원경 등의 앨범에 참여하긴 했지만 자신이 작곡한 한 두곡에만 연주를 맡았을 뿐 이전처럼 적극적으로 앨범에 관여하진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곳에서 신대철의 또 다른 길이 시작됐다. 그가 앨범 제작을 맡았던 손성훈과 함께 시나위를 다시 추스르게 된 것이다.
손성훈은 시나위 재결성 전 이미 솔로활동을 하고 있었고, 솔로 활동 이전에는 전사(Warrior)라는 밴드에서 활동했다. 손성훈(보컬), 김주영(드럼), 정한종(베이스) 그리고 최진우(기타)로 구성된 전사는 국내 라이브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일본에서 열린 경연대회에서 입상하며 펼쳤던 일본 활동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기타리스트 최진우는 전사 해산 후 ‘엉뚱한 상상 (White X-Mas를 기다리며)’을 히트시킨 지누와 동일 인물이며, 이후 조원선, 이상순과 함께 롤러코스터로 활동하기도 했고 작곡가 히치하이커로도 알려졌다. 어쨌든 손성훈은 신대철의 시나위 재결성에 대한 의지를 확인한 뒤 전사 해산 후 김세황과 함께 다운타운에서 활동했던 정한종과 제로-지(Zero-G) 출신의 드러머 신동현을 끌어들였다. 해체하고 5년 만에 시나위라는 이름이 음악 신에 다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앨범이 발매되기 전 시나위는 <한겨레신문>과 인터뷰를 가졌다. 이 인터뷰에서 신대철은 “개인적으로는 그전에 해보지 못한 자유로운 음악작업과 공연 등을 해보고 싶었고, 대중에게는 다양한 음악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대중음악은 너무 유행에 민감해 늘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선이 굵은 음악을 통해 경박한 우리 시대를 표현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같은 기사에서 정한종은 “기존의 록 음악이 상업성에 치우치고 록 본래의 정신을 잃어가는 데 대한 반발로 얼터너티브록이 태어났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고자하는 록은 굳이 분류하자면 얼터너티브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고 그런지/얼터너티브 사운드로 변신하게 될 시나위 5집의 성격을 설명했다. 또 월간 <서브>와 신대철의 인터뷰를 보면 “시나위에서 못 이룬 게 있었기 때문에 미련과 아쉬움이 많았다. 록 음악 전반이 4집 때와는 많이 변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얼터너티브록 분위기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록 신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를 수용해야했다. 물론 시나위 음악이 변했다는 소리를 듣는 등 위험요소를 내포하긴 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에게 시나위의 변신은 어쩌면 헤비메탈 사운드의 포기가 아니라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새로운 음악을 향한 발걸음을 떼는 용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천왕에게 밟힌 악귀의 모습이 담긴 사진 외에 앨범 타이틀이나 밴드의 이름조차 없는 흑백의 어두운 아트워크로 5집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도어즈(The Doors)와 너바나(Nirvana), 펄 잼(Pearl Jam),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를 동일선상에 놓고 버무린 사운드는 4집까지의 헤비메탈 사운드와도, 이후 결성했던 자유의 블루지한 하드록, 사이키델릭 사운드와도 다른 새로운 시나위의 출발점이 됐다. 손성훈의 보컬은 지난 시나위의 앨범으로 따진다면 데뷔앨범, 즉 임재범의 파워와 거친 질감을 갖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첫 곡 ‘나의 세계로’에서는 그나마 이전 시나위의 흔적이 살짝 남아있지만, 전반적으로 밴드는 그런지 사운드를 적극 수용했다. 신대철의 왼팔 포지션은 올라갔고 와우페달의 적극적인 활용을 비롯해 전체적으로 클래식 하드록의 기타 톤을 조합했다. 또 주변 밴드의 기타리스트와 경쟁하듯 높여왔던 무분별한 속주경쟁에 대한 강박을 비로소 떨쳐냈다. 어두워진 기타 톤은 이전과 달리 사회 전반에 걸친 사항들에 대한 진중한 고찰을 다룬 가사에 적절히 어울렸다.
5집의 대표곡 ‘매 맞는 아이’는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다룬 곡이다. 신대철은 인터뷰를 통해 “당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건들에 대해서 부른 곡이다. 개인적으로는 록 음악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참여적이고 사회적인 밴드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만큼은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매 맞는 아이’외에도 ‘상심의 계단’은 성공에 대한 욕망과 도전, 그로 인한 좌절과 실패를 그린 곡이고, ‘너에게 주고 싶어’, ‘내가 원하는 거’에서는 인간성이 상실돼 가는 세상을 향해 인간성 회복을 호소한다. 또 ‘지켜봐야 해’에는 환경파괴에 대한 우려, ‘나의 세계로’는 개인적인 고독과 고민이 담겼다. 발매 당시 카세트테이프에는 담기지 않고 CD에만 보너스트랙으로 담겼던 도어즈 커버곡 ‘Waiting For The Sun’은 앞서 언급했던 지미 헨드릭스, 도어즈와 너바나, 펄 잼, 앨리스 인 체인스를 동일선상에 놓고 버무린 사운드라는 이야기에 대한 부연이라 할 만 하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도어즈의 ‘Waiting For The Sun’과 함께 지미 헨드릭스의 ‘Bold As Love’, 신중현의 ‘꽃잎’ 등 평소 즐겨 연주하던 곡도 앨범에 담을 계획이라고 했지만, 음반에선 빠졌다. 하지만 ‘혼돈의 끝’의 후주와 같은 연주에서 들을 수 있듯 지미 헨드릭스의 영향력은 앨범 전체적으로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참고로 신중현의 ‘꽃잎’은 이후 김바다로 보컬이 교체된 후 발매된 6집 앨범에 담겼다. ‘Misfit To Society’는 시나위의 곡 가운데 이례적으로 영어 가사로 이루어진 곡이다.
신대철은 이후 인터뷰에서 “어떤 틀로 시나위의 음악을 규정짓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예전과 달라졌다는 일을 좋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생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뮤지션이라면 언제나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시나위의 스타일이 아닐까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시나위의 5집은 이러한 그의 생각이 본격적으로 음악에 반영되기 시작한 앨범이다. 적절하고 효과적인 코러스의 활용, 귀에 쏙 들어오는 반음 하강의 기타 리프 라인 등 이후 시나위의 앨범에 등장하게 되는 새로운 시그니처 사운드가 고스란히 담겼다. 김바다가 함께했던 시절의 시나위가 제2의 전성기라는 걸 부정할 일은 없겠지만, 그 시절 표현했던 모든 스타일의 출발점이 바로 이 앨범이란 점에는 주목할 만하다. 앨범이 발매된 후 언론에서는 비슷한 시기 활동을 시작한 지니(Geenie)와 함께 그런지 음악이 국내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중요한 실험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지니가 두 장의 앨범으로 단명한 반면 시나위는 손성훈 탈퇴 후 김바다를 영입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1990년대 중후반 국내 록의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 나가게 된다. (20230217)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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