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헤비메탈의 군웅할거 시대에 등장해서 단발의 사자후로 깊은 인상을 남긴 수작
1986년 시나위, 부활, 백두산의 데뷔앨범이 각각 세상에 나오며 국내 록계는 들썩였다. 한정된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만의 세상에서 ‘무협지’를 쓰던 이들이 정식 앨범을 통해 기존 ‘가수’들과 동일한 평가를 받을 기회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헤비메탈 밴드는 때마침 불어왔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의 소극장 공연과 맞물리며 보다 폭넓은 관객들과 호흡할 수 있었으며 <월간팝송>, <음악세계>, <뮤직 라이프> 등 해외 록 음악을 다루는 잡지는 신대철, 임재범, 이승철, 김태원, 김도균 등 새롭게 떠오른 국내의 젊은 ‘스타’를 지면을 통해 쉬지 않고 공개하며 신선한 이슈를 생산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파고다예술관’이나 이태원의 ‘라이브’ 등 헤비메탈 밴드의 활동 거점에서 활동하던 주변의 밴드까지 그 관심의 시각을 넓혔다. 하지만 정식 앨범 한 장을 발표하는 게 녹록치 않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러한 기사는 또 하나의 무협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면에 소개되는 뮤지션의 음악을 접하는 건 오직 공연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작은하늘 역시 음악보다 <월간팝송>에 실린 기사를 통해 먼저 알려졌다.
1986년 <월간팝송>에는 당시 라이브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국내 밴드에 대한 기사가 2회에 걸쳐 연재됐다. 기사에는 1집 라인업 이전 백두산의 상황과 괴짜들, 재편된 노고지리와 같은 밴드와 함께 작은하늘이 정식 소개됐다. 책에 소개된 작은하늘의 라인업은 김종서(보컬), 강기영(베이스), 이근형(기타) 그리고 이호규(드럼)다. 이호규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으로 알려진 키보디스트 이호준의 동생이다. 정식 기사와 함께 독자 리뷰 난에도 작은하늘이 등장했다. 이들의 라이브를 직관한 독자가 투고한 내용을 보면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러시(Rush)의 대표곡을 완벽히 소화하는 이들의 무대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기사는 어디까지나 기사였을 뿐 공연을 접할 수 없었던 독자들에게 작은하늘의 이야기는 “실력 있는 밴드가 있구나” 이상이 될 순 없었다. 기대감으로 음반을 기다리던 독자들은 기사에 등장한 멤버인 김종서와 강기영이 시나위의 2집 [Down & Up](1987)에 참여한 걸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아리랑, 혼 같은 밴드와 함께 작은하늘이라는 이름은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같은 해인 1987년 말, 작은하늘의 데뷔앨범이 발표됐다. 데뷔앨범의 라인업은 이근형(기타), 김성헌(보컬), 박문수(베이스, 보컬) 그리고 김도연(드럼)으로 꾸려진 4인조였다. 한 해 전 기사를 통해 소개된 멤버 가운데 이근형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교체될 만큼 밴드의 내부 사정은 복잡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궁연은 백두산이 연습실로 사용하던 서라벌레코드의 스튜디오에서 김도균을 만나 드럼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타리스트에게서 드럼을 배운 탓에 코드 진행과 변화에 따라 패턴을 달리하는 자신만의 연주스타일이 생겼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집에 음악 하는 걸 숨기기 위해 사용한 이름이 김도연이다. 스승 김도균의 이름 두 글자에 자신의 본명을 넣은 가명이다. 김성헌은 헤비메탈 음악을 하기위해 유현상을 찾아갔다가 유현상이 이근형에게 소개했다. 작은하늘의 앨범보다 먼저 발매된 백두산의 2집 [King Of Rock'N Roll](1987)의 대표곡 ‘The Moon On The Baekdoo Mountain’이나 ‘And I Can't Forget’과 같은 곡에서 코러스로 참여한 김성헌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다. 여러모로 백두산과 연관된 끈을 가진 작은하늘의 데뷔작을 제작한 것 역시 유현상이다.
국내 헤비메탈의 신호탄이 됐던 시나위의 데뷔앨범이 발표되고 1년이 조금 넘게 지났지만 그동안 국내 헤비메탈계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소위 1세대로 불리는 시나위, 부활, 백두산의 두 번째 앨범이 모두 1987년에 발매됐지만 동일한 멤버를 유지한 밴드는 하나도 없었다. 멤버간의 갈등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본격적인 경쟁 체제로 들어가며 보다 양질의 사운드를 추구하려는 밴드 리더의 욕심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들의 데뷔앨범과 2집 앨범을 비교할 때 월등히 나아진 녹음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작은하늘의 앨범은 비슷할 시기 발표된 국내 헤비메탈 밴드의 앨범 가운데 특히 전체적인 밸런스가 우수한 작품이다. 악기의 음색은 엉키지 않아 명확히 구분되며 보컬 파트를 잠식하지 않는다. 이렇게 안정적인 녹음은 자신감 넘친 멤버들의 연주와 함께 확실한 시너지로 작용했다. 다른 헤비메탈 밴드의 기타리스트들이 속주에 천착하며 경쟁하듯 속도를 올릴 때 작은하늘의 이근형은 스케일 큰 밴드 사운드에 어울리는 다양한 스타일의 솔로를 음반에 담았다. 충실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뛰어난 연주를 들려준 탓에 그는 앨범 발매 후 라디오 프로그램과 록 매거진에 기타 강좌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근형의 호쾌한 아밍과 함께 창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 김성헌의 독특한 발성으로 포문을 여는 오프닝 트랙 ‘떠나가야지’의 쫄깃한 그루브는 비슷한 시기 국내는 물론 해외의 헤비메탈 트렌드가 아니라 1970년대의 하드록에 근간을 둔 것이었다. 김종서가 작사한 어쿠스틱 발라드 ‘은빛 호수’는 후반부로 갈수록 묵직하게 발전하는 구성이 돋보이는 트랙으로 2013년 이근형이 프로젝트 밴드 S.L.K.의 유일한 앨범를 통해 셀프리메이크하기도 했다. NWOBHM(뉴 웨이브 오브 브리티시 헤비메탈)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자연의 조화 (허리케인)’와 베이시스트 박문수가 마이크를 잡은 ‘모터 싸이클’의 시원스런 질주와 앞서 ‘떠나가야지’처럼 거침없이 호방한 스케일의 하드록 ‘Rock'n Roll’의 공존은 데뷔앨범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모두 보여주려는 욕심을 그대로 반영한다. ‘가요’ 풍 매끄러운 멜로디와 가사에 두터운 연주의 옷을 입은 ‘깨어진 약속’, 중반부 이후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풍 장중한 리프를 삽입하며 대곡 지향의 프로그레시브한 진행을 들려주는 ‘잃어버린 시간’까지 총 7곡이라는 수록곡이 아쉬웠는지 천편일률적인 ‘건전가요’ 대신 ‘우리의 소원’을 직접 불러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이번 재발매되는 LP에는 재발매된 CD에만 담겼던 ‘잃어버린 시간’과 ‘은빛 호수’의 데모버전도 함께 수록됐다. 데모 버전이라고는 하지만 녹음 상태로 봐서는 음반 녹음 시 함께 녹음된 다른 테이크로 보이며 원곡과 비교 감상하면 흥미롭다.
‘우리의 소원’이 끝난 뒤 “지금까지 저희 작은하늘의 음악을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는 다짐의 멘트가 무색하게 작은하늘은 음반을 발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성헌(보컬), 이근형(기타), 이근상(기타), 박현준(베이스), 장혁(드럼)으로 멤버가 교체됐고 이근형과 박현준은 새로운 밴드 카리스마 결성을 위해 밴드를 떠나게 된다. 남은 멤버인 이근형의 동생 이근상과 장혁은 이후 부활로 이적하는 김재기(보컬)과 장세윤(베이스)을 맞아들여 데뷔앨범의 멤버가 한 명도 참여하지 않은, 새로운 작은하늘의 앨범을 발표한다. 어찌 보면 ‘은빛 호수’에서 연상할 수 있는 ‘백조의 노래’가 된 작은하늘의 데뷔앨범이지만 국내 헤비메탈의 군웅할거 시대에 등장해서 탁월한 실력을 바탕으로 한 단발의 사자후로 삽시간에 청자를 제압하며 깊은 인상을 남긴 수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221219)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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