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국내 첫 여성 헤비메탈 보컬리스트 도원경의 데뷔작
1988년 유일한 앨범을 발표한 이브(Eve)의 활동이 1년 만에 중단된 후 국내 하드록/헤비메탈 신에서 여성 뮤지션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장르 자체는 한동안 해외에서조차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1990년대에 들어서며 그마저도 주류에서 멀어졌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93년, 지금까지도 국내 록 팬의 입에 꾸준하게 회자되는 두 장의 앨범이 발표됐다. 한 장은 부산 발 하드록 밴드 와일드 로즈(Wild Rose)의 데뷔작이며, 또 한 장은 솔로 보컬리스트 도원경의 데뷔앨범이다. 와일드 로즈에게는 소의 ‘조베이스 사단’으로 불리는 메탈라이브, 도원경에게는 소위 한국 헤비메탈의 1세대로 불리는 백두산의 유현상과 이은하와 호랑이들, 그룹 신은 물론 무당이나 지해룡와 락 코리아(Rock Korea)를 거치며 또렷하게 음악 판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온 최희선이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와일드 로즈에게는 ‘그대처럼’, 도원경에게는 ‘성냥갑 속 내 젊음아’라는 지금까지 뮤지션의 이름과 동일선 상에 놓일 대표곡을 앨범에 수록했다.
도원경은 계원예술고등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이후 인터뷰를 보면 그녀는 자신의 보컬 톤은 고울 뿐이고 파워풀한 성량은 아니었지만 연습생 시절 음반제작자의 제의로 록에 입문했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록 보컬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도원경은 파워풀한 보컬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훈련을 하던 중 목에 이상이 생겨 노래를 부르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강렬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었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이전까지 우리 음악계에 없던 본격적인 첫 여성 록 보컬리스트의 자리에 올랐다. 우연히 연습실을 찾은 한 방송국 프로듀서에 의해 이미 앨범이 발매되기 전 방송 전파를 타는 기회를 잡았고, 방송 이후에 관심을 보인 광고주는 ‘신인 가수’에게 초콜릿 CF를 맡기는 모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보물섬>, <만화왕국>, <아이큐 점프> 등 만화 전문 잡지에 히트작을 연재하며 인기의 상한가를 구가하던 김동화 화백이 그린 고양이와 오토바이에 오른 가죽 옷의 여성 라이더가 인상적인 아트워크로 등장한 도원경의 데뷔앨범은 1993년 5월 아세아레코드를 통해 발매됐다. 김동화 화백은 이미 1986년에 발표된 강인원의 두 번째 앨범의 삽화를 그리며 음악계와 인연을 맺었지만 강인원의 앨범 삽화와 도원경의 아트워크는 그 느낌이 많이 다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도원경의 데뷔앨범은 수록곡 대부분을 유현상이 작곡했고, 최희선이 앨범 전체의 편곡과 디렉팅 그리고 기타 연주를 담당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국내 헤비메탈의 최전방에서 활약했던 유현상, 최희선과 함께 그보다 이전인 초창기 국내 록 신을 일궈낸 뮤지션의 참여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키보드를 맡은 노승준은 유현상과 함께 라스트 찬스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검은 나비와 불새를 거친 베테랑 뮤지션이며, 드럼의 이건태 역시 최희선과 함께 락코리아에서 활동한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천하대장군, 윤수일 밴드, 송골매 그리고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한 멤버다. 유현상이 작곡하지 않은 두 곡은 각각 이호준과 김갑춘이 작곡했는데, 이호준은 동방의 빛, 석기시대와 위대한 탄생 출신이고, 김갑춘은 드래곤스(Dragons)의 멤버로 활동했다. 국내 최초의 여성 록 보컬리스트를 잉태하기 위해 국내 록의 초창기부터 앨범 녹음 당시까지를 종으로 관통하는 계보가 참여했다는 사실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앨범을 감싼 아트워크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 한 장의 앨범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흐느적거리는 키보드연주와 찰진 기타 리프, 그리고 고조되는 보컬 샤우팅으로 시작되는 ‘성냥갑 속 내 젊음아’는 앞서 이야기했듯 지금까지도 도원경이라는 보컬리스트의 이름과 동일선상에 놓일 만큼 커다란 임팩트로 등장한 곡이다. 원래 작곡자 유현상이 ‘사랑위해 흘린 눈물’이란 제목으로 1985년 발표한 곡을 다시 이정석이 1989년 자신의 3집 앨범에 뉴웨이브 스타일로 편곡해서 수록했지만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곡이지만 새로운 가사와 편곡으로 등장하며 단번에 도원경의 대표곡이 됐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본격 여성 헤비메탈 보컬리스트의 탄생이었다. 차분하게 진행되는 ‘재회의 시나리오’, 도원경이 직접 작사를 담당하고 이호준이 작곡한 ‘관심’과 같은 곡은 마치 백두산의 데뷔앨범 수록곡이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가요 스타일의 멜로디지만 편곡을 통해 도원경을 위한 맞춤옷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Younger Days’는 ‘성냥갑 속 내 젊음아’의 영어 버전으로, 가사만 바뀌었지만 언뜻 1980년대 후반 등장한 미국 출신 여성 4인조 밴드 빅슨(Vixen)이 떠오르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던 평범한 가요 스타일의 멜로디에 덧입혀진 로킹한 편곡은 이어지는 셔플 리듬의 ‘환상의 도시’나 김갑춘이 작곡한 블루스 넘버 ‘비요일의 Blues’에서도 여지없이 이어진다. 반면 성대를 한껏 누르고 파워풀한 보컬을 구사하는 도원경의 목소리는 로커로 거듭나기 위한 그녀의 노력을 그대로 반영한다. 가사를 바꿔 새롭게 녹음한 ‘성냥갑 속 내 젊음아’를 비롯해 영어 버전이 아닌 모든 곡을 작사한 정하늘의 가사에서는 일관되게 차가운 도시의 정서가 표현되며 초기 도원경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앨범은 ‘환상의 도시’의 영어 버전 ‘Fantasy’로 모두 마무리된다.
도원경은 유현상은 물론 국내 헤비메탈의 시작을 알린 소위 3대 밴드인 시나위, 부활, 백두산의 기타리스트인 신대철, 김태원 그리고 김도균에게 모두 곡을 받아 앨범에 수록한 유일한 뮤지션이다. 물론 시대를 넘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은 김태원이 작곡한 4집과 5집의 ‘다시 사랑한다면’과 ‘이 비(悲)가 그치면’을 꼽아야하겠지만, ‘헤비메탈’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음악적으로나 대중적인 인기 면에서 지금까지 이 앨범에 담긴 ‘성냥갑 속 내 젊음아’를 넘어서는 곡은 없었다. 무대에 등장하며 페이드인 되는 샤우팅이나 기타 스매시 퍼포먼스 등 본격적인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로 그녀의 이름을 각인 시킨 이 곡은 여성에게만은 유독 불모지였던 국내 록 신에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며 이후 등장하게 되는 많은 여성 로커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수록곡 모두 양질의 결과가 담겼다고 말하기엔 그 편차가 다소 존재한다. 하지만 발매 이전과 이후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국내 록의 역사에 있어서도 새로운 분기점을 만든 중요한 앨범임엔 분명하다. (20231005)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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