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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MUSIC LIFE/LINER NOTES (DOMESTIC)

카리스마 [Warning]

한국 헤비메탈의 전성기에 발표된 ‘어벤저스’ 급 멤버의 유일한 앨범

 


1987년 겨울 작은하늘의 데뷔앨범이 발매됐다. 계보로 따진다면 작은하늘은 시나위, H2O와 같은 계보로 묶는 게 좋다. 데뷔앨범 발매 이전 작은하늘 멤버였던 김종서와 강기영은 시나위로 이적해서 2집 앨범을 녹음했고, 작은하늘의 앨범에서 보컬을 맡은 김성헌은 다시 시나위의 3집에서 마이크를 잡게 된다. 작은하늘 데뷔앨범 발매 직후 가입해서 베이스를 연주했던 박현준은 이근형과 함께 밴드를 이탈해서 시나위에서 나온 김종서와 함께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게 되는데 그 밴드가 바로 카리스마다. 역시 시나위를 나온 드러머 김민기까지 가세했지만 박현준은 김종서와의 불화로 앨범 녹음을 마친 뒤 카리스마를 탈퇴했고 그 자리엔 김영진이 가입했다. 앨범 속지에는 김영진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녹음엔 참여하지 않았다. 강기영과 박현준, 그리고 김영진, 김민기는 이후 H2O를 오간다. 이 모두가 시나위의 데뷔앨범과 함께 본격적으로 촉발된 국내 헤비메탈 신에서 1986년에서 1988년 사이 벌어진 밴드간의 멤버교체였다. 

이들 외에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다른 밴드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이합집산은 당시까지 우호적이던 매체들까지 ‘시나위, H2O 멤버교체, 외인부대 해산설 내막’(<음악세계> 1988년 2월호), ‘툭하면 깨지고 갈아치우는 그룹은 이제 싫어요’(<음악세계> 1988년 5월호)라는 기사를 내며 우려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근형의 인터뷰에 따르면 카리스마에 가입하는 멤버들 모두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비슷한 류의 음악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끼리끼리의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뮤직라이프> 1988년 12월호 ‘돌풍 예고! 가요계 새별 행진이 뜨겁다’ 가운데 카리스마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들 4인조는 현재 국내 헤비메탈계를 주름잡고 있는 인기 그룹 중에서 최고의 실력, 인기, 외모 등을 소유한 세션맨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 현 라인업으로 구성된 멤버들이 발표한 앨범엔 ‘Run Away’, ‘저 산 너머’ 등 도시적인 감각의 아스팔트 록을 추구한다. 현 그룹들이 해체와 교체 등 불안한 상태에 있는 이 상황에 완벽한 음악을 창출해낼 각오로 충만한 카리스마가 대중들에게도 어필할 수가 있는 코리안 록 의 진면목을 보여주리라 기대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표현 가운데 ‘아스팔트 록’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이근형이 <서브> 매거진과 한 인터뷰를 보면 “헤비메탈로 ‘가요 톱 텐’을 쓸어버리겠다는 무모할 정도의 생각도 했다. 그리고 반응도 좋았다.”라는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어찌됐건 언더그라운드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헤비메탈 밴드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반 가요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반영이었을 것이고, 타 밴드의 이합집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고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가시적으로는 뮤지션으로서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지는 듯 보였다. 작은하늘의 앨범제작을 맡았던 유현상이 아예 백두산에서 나와 기획자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음악세계> 1988년 2월호 기사 가운데 ‘백두산의 유현상 머리 깎고 매니저 선언’을 통해 알 수 있듯 백두산과 작은하늘을 관리하던 백두산 기획은 조항조, 야차, 이지연 등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는 기획사로 몸집을 불렸고, 카리스마 역시 유현상의 매니지먼트를 받게 된다. 당시로 본다면 어벤저스 급 헤비메탈 뮤지션의 조합, 그리고 이쪽 음악의 생태계를 꿰뚫고 있던 매니저가 만나 1988년 말 발매한 카리스마의 유일한 앨범에 국내 헤비메탈 관계자와 애호가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오프닝트랙 ‘Run Away’의 도입부에서 들을 수 있는 미디움 템포의 시원스럽고 여유 있는 리프를 치고 오르는 김종서의 단발형 외침은 그 관심에 대한 날선 답변과도 같았다. 래트(Ratt)의 스테판 퍼시(Stephen Pearcy)와 종종 비교되던 김종서의 보컬 매력을 한껏 살린 오프닝트랙에 이어지는 ‘Rock'n Roll Party’는 흥미로운 구성과 물오른 이근형의 기타 테크닉이 돋보인다. ‘빛바랜 옛 사진 속에’는 이펙트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기타와 앙칼진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실험적인 트랙으로, 앨범 제작 당시 밴드의 자신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헤비메탈’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베스트 트랙으로 꼽기에 손색없는 ‘Warning’이 품고 있는 매서운 독기는 응축된 에너지의 결정체와 같고, 작은하늘의 ‘떠나가야지’를 연상시키며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진군하는 ‘저 산 너머’와 함께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결기에 찬 가사를 품고 있다. 가요 스타일의 가벼운 접근을 보여주는 발라드 ‘너에게’로 완급의 묘미를 살린 후 이어지는 ‘Rock'n Roll’은 작은하늘의 앨범에 수록됐던 곡의 셀프 리메이크와 같은 곡으로 김성헌과 김종서라는 당대를 대표하는 헤비메탈 보컬리스트의 스타일을 비교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전체적으로 동시대 활동하고 있는 밴드를 의식한 탓인지 작은하늘 앨범에 비해 이근형의 기타 속주 비중이 늘어났으며, 소위 마이크 바니(Mike Varney) 사단으로 불리던 해외 슈레더들의 인스트루멘탈 음반 수록곡을 연상시키는 연주곡 ‘사하라’로 앨범은 모두 마무리된다.

하지만 의욕적인 앨범 수록곡과 달리 카리스마의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백두산 기획 소속 가수 가운데 이지연의 인기가 고공행진을 하며 매니저 유현상이 그 활동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카리스마는 ‘내놓은 자식’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유현상은 자신의 자서전 <꿈을 향해 소리쳐>(2010)에서 “다만 아쉬웠던 점은 다시 한 번 헤비메탈 붐을 일으키기 위해 실력 있는 친구들을 뽑아 만든 카리스마가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카리스마는 지연이 공연의 오프닝은 물론 연주까지 맡아 했었다. 얼마 전에 방송국에서 만나 사과했지만, 나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을 종서에게 미안하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결국 카리스마 멤버들은 헤비메탈로 가요 톱 텐에 오르겠다는 야심을 뒤로한 채 결성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주변 밴드로 흩어졌다. 이근형은 세션 위주의 활동으로 음악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짧은 활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당대를 대표하는 헤비메탈 뮤지션이 의기투합하며 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여건에서 만들어진 앨범이었던 까닭에 양질의 결과물을 음반에 담을 수 있었다. 작은하늘의 앨범에 비해 밸런스가 좀 맞지 않아 악기 소리가 다소 답답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한국 헤비메탈의 전성기에 발표된 앨범 가운데서도 꼭짓점에 올려놓기에 손색없는 앨범이다. (20221220)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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