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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ER'S PRIVATE LIFE/BOOKSHELF

신경숙의 ‘리진’

지난 번 이 소설을 언급하며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적성에 잘 맞지 않아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완전히 취소다. 처음에나 조금 적응하기 어려웠지, 어느 정도 읽고나니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읽어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소설이 하고싶었던 이야기 역시 처음으로 프랑스 땅을 밟은 조선의 궁중 무희 리진과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프랑시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리진의 시선으로 바라본 명성황후에 대한 내용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리진의 시선이란 바로 작가 신경숙의 시선, 즉 신경숙의 시선으로 본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라는 얘기다.

 

사실, 지금이나 명성황후라는 단어를 어렵지않게 사용하지 학교에 다닐 때는 무척이나 생경한 단어였다. 분명히 국사 시간에 민비라는 이름으로 배웠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학교에서는 어떻게 배웠는지 잘 모르겠지만, 암튼 내가 배웠던 기억 속의 민비는 흥선대원군에 맞서 나라를 망하게 했던 악역의 캐릭터로 남아있었다. 물론 이러한 민비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로 거듭나게 된 데는 이문열 원작을 뮤지컬로 옮긴 뮤지컬 명성황후의 역할이 가장 컸을 것이며, 한 편도 보지 않았지만 이미연이 주연을 맡은 TV 드라마의 영향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나치게 국수주의적 시선이라는 평도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우리가 학창시절 배웠던 커리큘럼이 일제의 잔재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는 억울한 생각 역시 지울 수 없다.

 

리진의 시선에 들어온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어 간다. 어렸을 때 직접 배를 수저로 떠서 먹여주는 부드러운 여인에서 복수를 결심하는 표독스런 모습, 또 사리에 맞는 의사결정을 하는 현명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모든 모습들을 포괄하는 단어는 바로 어머니라는 실루엣이다.

 

중반부 이후 숨 가쁘게 흘러가는 스토리. 리진은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조선을 선택했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는 상해에서 김옥균을 저격한 후 수구파의 영웅이 되었으며,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의 습격으로 처참하게 시해당한다. 얼마 되지 않는 리진에 대한 기록을 토대로 이러한 사건들을 필연적인 인과관계처럼 풀어간 작가 신경숙의 상상력이 놀랍고, 꼭 들어맞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조수미가 불렀던 나 가거든의 뮤직비디오가 떠올랐다. 김탁환이 쓴 같은 소재의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역시 읽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아직은 이 소설의 느낌을 그냥 간직하고 싶다.